"일본경제가 앓고 있는 병은 뿌리를 파고 들어가면 모두 낡은 시스템에 원인을 두고 있습니다. 태평양전쟁을 치르기 위해 정부가 강제로 동원한 전시 체제, 그리고 이에 길들여진 기업풍토와 금융환경이 바뀌지 않는 한 일본 경제의 회생은 요원합니다" 노구치 유키오(野口悠紀雄,61) 일본 아오야마대 교수(국제매니지먼트 연구과)는 일본이 현재 직면한 위기는 시대에 뒤떨어진 구식경제의 덫에서 벗어나지 못한데 있다고 명쾌하게 진단했다. 이와함께 일본은행들의 불량채권이 세계 금융계의 골칫거리로 지목되고 있지만 불량채권 처리보다는 노후화 된 전근대적 금융시스템을 치료하는 것이 더 근본 처방이라고 잘라 말했다. 21세기 세계 경제의 향방을 좌우할 최대 변수로 중국의 급성장을 지목한 그는 "일본은 제조업이 강해 중국의 도전에 끄떡없을 것이라는 견해는 세상 변화를 너무 모르는 것"이라고 일축했다. 관료사회와 기업에 끊임없이 날카로운 비판을 들이대며 일본경제의 대변신을 역설해온 그를 시부야의 사무실로 찾아갔다. -고이즈미 내각이 출범한 지 반년이 다 돼 갑니다.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가 의욕적으로 밀어붙이는 경제개혁이 잘될 것으로 봅니까. "장기적으로 누적된 병폐를 털어내고 체질을 근본적으로 뜯어 고치겠다는 고이즈미 개혁의 방향이 옳은 것은 사실입니다. 개혁 청사진과 의욕도 평가할 만하지요. 그러나 일본 경제는 구조적으로 너무 많은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개혁의 핵심 프로그램 중 하나인 재정 건전화만 해도 그렇습니다. 고이즈미 내각은 재정적자를 줄이기 위해 국채 발행을 연간 30조엔 이내로 억제하겠다고 다짐했지만 재정적자의 근본 원인은 세수감소에 있습니다. 기업활동이 침체하면서 수익이 줄어들고, 그러다 보니 법인세 수입이 크게 감소했습니다. 기업들로부터 걷어들이는 세금이 격감하면 국가 재정에 구멍이 나는 것은 당연한 이치 아닌가요. 일본의 법인세 수입은 90년대 10년 동안 거의 절반 수준으로 줄어 들었습니다. 가닥은 옳게 잡았지만 고이즈미 내각도 실질적으로는 아직 아무 것도 해 놓은 것이 없습니다" -서방 선진국과 국제 금융계는 일본 은행들의 불량채권을 가장 폭발력이 강한 뇌관으로 보고 있습니다. 처리전망을 어떻게 보는지요. "불량채권이 일본경제의 큰 골칫거리 중 하나인 것은 분명하지만 불량채권이 제로(0)로 된다고 일본경제가 바로 잡히는 것은 아닙니다. 불량채권은 땅값 하락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은행들이 기업에 빌려준 돈은 대다수가 부동산을 담보로 잡고 빌려준 것입니다. 땅값이 떨어지면 자연 담보물 가치도 하락하게 돼 있습니다. 담보물 가치가 줄어들면 대출채권의 위험도는 가만 있어도 올라가지요. 땅값하락 등 자산디플레는 생각지 않고 불량채권 자체에만 매달리는 것은 균형을 잃은 사고입니다" -불량채권보다 더 큰 문제가 있다는 뜻입니까. "일본경제의 진짜 고민은 기업에 있습니다. 기업들이 환경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것이 문제입니다. 세계 경제환경은 숨가쁘게 바뀌고 있는데 기업들은 옛날 사고와 행동양식,낡은 시스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잘 적응하고 성공적으로 변신한 기업들도 극소수 있긴 하지만…" -좀 더 자세히 설명해주시죠. "일본기업의 절대 다수는 최고 경영자 자리가 내부승진으로 채워집니다. 외부영입이 많은 미국과 정반대입니다. 일본 경영자들은 자연 외부와 시장의 압력을 의식하지 않습니다. 일거수 일투족이 시장에 노출되고 투자자들로부터 심판받는 구미 국가와 달리 일본 경영자들은 외부 상황 변화를 크게 의식하지 않지요. 시장에 공개돼야 할 정보도 내부에서 차단되고 은폐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기업이 눈치를 보는 곳은 돈을 빌려 주는 은행 정도입니다. 돈이 모자라면 은행에 손을 벌렸고 은행은 돈줄을 갖고 있으니 은행 외에 시장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었던 것이지요" -일본기업들이 안고 있는 문제를 '1940년 전시체제'라는 독특한 용어로 진단했는데. "그렇습니다. 1940년은 일본이 태평양전쟁에 돌입하기 1년 전입니다. 집단주의와 관료통제,생산자 우선주의,경쟁기회 제한 등 전쟁을 치르기 위한 시스템이 속속 완비된 시기이지요. 문제는 이 당시 생겨난 구조가 지금껏 뜯어 고쳐지지 않은 것이 일본 기업,일본경제의 위기로 연결됐다는 것입니다. 1940년 전까지는 일본도 지금과는 달랐습니다. 기업들이 시장에서 직접자금을 조달했습니다. 하지만 정부가 전쟁준비를 위해 기업을 채찍질하면서 구석구석에 통제의 그물을 쳐 놓았습니다" -기업 내부에 남아 있는 전시체제는 무엇입니까. "대략 3가지입니다. 종신고용과 연공서열의 기업시스템이 첫 번째입니다. 둘째는 기업이 은행에 돈줄을 의존하는 간접 금융시스템이고 마지막으로 정부가寬1蓚殆?영향력을 행사하는 규제 시스템입니다. 종신고용, 연공서열은 인재의 이동을 제약하고 기업을 폐쇄적으로 만듭니다. 조금 전에도 말했지만 내부에서 뽑힌 사장은 시장의 압력을 크게 의식할 필요가 없어집니다. 기업이 은행에 지나치게 손을 벌리다 보니 은행의 입김은 불필요하게 커졌고…" -그렇다면 고이즈미 내각은 경제회생의 방향을 어떻게 잡아야 될까요. "고이즈미 개혁은 낡은 시스템을 혁파하는 데 중심을 두어야 합니다. 은행 불량채권이 문제가 아니라 시스템의 위기가 더 심각하다고 봅니다. 전쟁을 치르기 위해 동원한 전시체제를 반세기가 지난 지금까지 계속 끌고 온 것이 오늘의 일본 경제를 위기로 몰고 간 것입니다. 기업만 해도 그렇습니다. 일본기업들의 정보는 거의 외부에 공개가 안됩니다. 정보의 공개,교류가 차단되면 기업은 강해질 수 없습니다. 시장의 압력이 세지면 기업은 프로 경영자를 내세우게 돼 있습니다. 일본형 시스템을 개혁한다고 많은 기업들이 노력했지만 상당수 기업은 종신고용,연공서열이 경영의 축이고 은행 중심의 금융시스템도 여전합니다. 일본은 아직 규제형 경제입니다. 금융개혁의 근본 처방은 은행 중심에서 시장 중심으로 전환하는 것에 맞추지 않으면 안됩니다" -마더스, 나스닥재팬 등 벤처기업을 위한 증시가 설립되는 등 일본도 최근 수년간 기업들이 시장에서 자금을 조달하는 직접금융이 많이 활성화됐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시장을 세우는 것으로 다 끝났다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마더스, 나스닥재팬이 처음 생길 때만 해도 기대가 컸지만 결과는 신통치 않습니다. 증시자체의 문제도 적지 않습니다. 기업정보가 폐쇄된 상태에서 주가가 급등락하니 투자자들의 신뢰를 얻을 수 없습니다. 리스크가 너무 커 개인투자자들이 시장에 참가하기 어렵다는 얘기입니다. 일본증시의 개인투자자 비율은 20%에도 못 미칩니다" -일본경제가 줄곧 몰락의 길을 걷게 된 원인을 구체적으로 진단해 주십시오. "직접적 이유는 국제 경제환경 변화와 동아시아 지역의 공업화, 그리고 정보통신의 급속한 발달을 들 수 있습니다. 여기에다 1940년 전시경제 체제에 발이 묶인 일본 기업과 정부가 변화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것이 오늘의 일본 경제를 이렇게 만들었습니다. 동아시아 중에서도 중국의 눈부신 경제성장은 21세기 세계 경제에 태풍의 눈입니다. 일본은 중국이 할 수 없는 분야를 찾아 새로 시장을 만들지 않으면 견뎌낼 수 없을 것입니다. 웬만한 것은 중국이 다 순식간에 쫓아옵니다. 한국도 일본과 같은 처지임은 물론입니다. 맞붙어 경쟁해서는 살아 남을 수 없습니다" -일본 식자층에서는 그래도 제조업이 세계 정상이니 일본 경제가 괜찮다는 견해가 적지 않습니다. "그건 세상 변화를 몰라서 하는 소리입니다. 일본의 경쟁력은 이미 일류가 아닙니다. 스위스의 IMD는 일본의 경쟁력이 전세계 국가중 26위밖에 되지 않는다고 발표하지 않았습니까" -일본경제가 경쟁력을 되찾는 시기는 언제쯤일 것으로 봅니까. "지극히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1940년 전시체제의 낡은 틀이 기업과 은행을 옭아매고 있으며 산적한 환부 때문에 경제는 활력을 잃고 있습니다. 일본 앞에 놓인 길은 금융완화를 통해 기업들의 수명을 연장시키며 낡은 구조를 그대로 끌고 갈 것인가,아니면 경제구조를 과감히 전환할 것인가의 두가지 중 하나입니다" 대담=양승득 도쿄특파원 yangsd@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