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전국경제인연합회 등 경제단체들은 정치자금 전달의 창구 역할을 해 왔다는 비난을 받아왔다. 내놓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전경련이 정치자금을 제공하는 창구 역할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던 게 사실이다. 이같은 사실은 역대 전경련 회장들이 정치자금 모금활동을 않겠다고 잇따라 밝힌 데서도 엿볼 수 있다. 전경련이 '정치자금 모금'이란 사슬에서 벗어나겠다는 선언을 처음 한 것은 지난 92년 초. 유창순 당시 전경련 회장은 연두 기자회견을 통해 "일부 기업주들이 개인적인 친분에 따라 소액을 지원하는 일은 있겠지만 경제단체에서 돈을 모으는 일은 하지 않을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어 고 최종현 SK 회장도 93년 2월 전경련 회장 취임사를 통해 비공식적인 정치자금을 거두지 않겠다고 거듭 천명했다. 전경련은 지난 95년 11월 노태우 전 대통령의 비자금 사건이 불거져 나오면서 기업관련 여부에 세간의 이목이 집중되자 다시한번 정치자금과의 단절을 공식 선언했다. 정치자금과 관련한 전경련의 역할은 문민정부 이후 차츰 달라지기 시작했다. "통치권자가 직접 정치자금을 받지 않겠다고 공언한 데다 강도높은 기업개혁 드라이브가 걸리면서 '정치자금 창구'라는 멍에에서 벗어나게 됐다"는 것이 전경련 관계자의 설명이다. 그 결과 지금은 전경련도 일반기업들과 마찬가지로 사단법인 자격으로 각종 후원회에 참여하는 수준으로 바뀌었다. 올 상반기에 있은 민주당과 한나라당의 중앙당 후원회에도 경제5단체가 함께 참여해 일정금액의 후원금을 전달하는 정도에 그쳤다. 구체적인 후원금액은 확인되지 않았으나 대체로 중앙당 후원에는 1천만원선, 지구당의 경우에는 수십만원 수준인 것으로 알려졌다. 정치헌금 문제로 곤욕을 치르기는 일본 경제계도 마찬가지였다. 일본 경제단체연합회(게이단렌)는 지난 93년 9월 회장단회의를 열어 '94년부터 정치헌금 알선을 폐지한다'고 결정했다. 히라이와 가이시 당시 게이단렌 회장이 이를 주도했다. 회장단 일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히라이와 회장이 이같은 결심을 굳혔던 것은 기업의 정치자금 제공에 대한 여론의 지탄을 받은게 직접적인 계기였다. 지난 92년 자민당 부총재와 니가타현 지사가 기업으로부터 돈을 받은 사실이 드러난 데다 93년 들어서도 정치인들이 건설회사에서 거액의 정치자금을 받은 일이 탄로났던 것. 물론 93년 7월 총선거에서 지지세력인 자민당이 야당으로 전락했던 것도 정치자금 모금 중단 선언의 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그러나 정치자금 대신 파티초대권을 구입해 달라는 등 정치인들의 변칙 요청이 잇따르자 '차라리 게이단렌이 정치헌금 알선을 부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기도 했다. 한.일 양국의 정치풍토에 비춰 볼 때 기업의 정치헌금이 완전히 사라지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그러나 적어도 경제단체가 앞장서 정치자금을 거두는 행태는 사라진게 분명하다. 손희식 기자 hssoh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