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4대문 안에는 지금도 조선시대 불교를 상징할 만한 유물이 거의 없다. 원각사지의 10층석탑과 원각사비,원래 원각사종이었던 보신각종이 고작이다. 이들 유물은 세조의 불교보호정책 덕에 살아 남았다. 조선 초 11종이었던 불교는 태종 때 7종으로 줄었고 세종 때 선(禪) 교(敎) 양종이 됐다가 중종 때는 도첩제 폐지로 종단자체가 없어졌다. 승려는 4대문안 출입이 금지되는 등 시민권도 완전히 박탈 당했다. 명종 때 불교중흥운동이 일기도 했으나 억불정책은 더 심해졌다. 그나마 불교의 명맥을 잇게 해준 것은 궁중여인들과 여염 아녀자들의 신앙이었다. 이처럼 혹독한 억불정책 때문이었지는 몰라도 절에 드나드는 불교신자 가운데는 타 종교에 비해 유난스레 남자나 젊은이보다 여자와 나이 먹은 신도들이 많았다. 그래서 70년대 말까지만 해도 한국불교는 '치마불교'이고 '기복(祈福)신앙'이라는 낙인이 찍혀 있었다. 그동안 비구 비구니로 구성된 승가도 엎치락 뒤치락하는 종단 재산싸움, 종권다툼에 휘말리면서 세속화에만 정신이 팔려 중생교화는 외면하는 수도집단으로 매도됐다. 승가는 불교학계내에서도 '상구보리 하화중생'이라는 보살정신을 구현하지 못하는 보수집단으로 비판받기도 했다. '팔만대장경이란 가사와 악보가 아무리 훌륭하다 해도 부처님의 말씀을 멋있게 노래부를 가수가 없다'는 한 불교학자의 통탄도 나왔다. 한국불교의 장자종단인 조계종이 시험으로 승려의 품계를 주는 '승가고시'를 부활시킨데 이어 이번에는 신도면 누구나 의무적으로 받아야 하는 신도기본교육을 선언하고 나섰다. 내년초부터는 6개월 동안의 신도기본교육을 마쳐야 신도등록증도 주고 수계도 할 수 있다고 한다. 교육의 내용은 불자예법, 부처님 생애, 기본교리등이다. 현실을 감안하지 않은 무리한 일이라는 비난도 있다지만 종단의 조직화를 위해 시행착오도 감수하겠다는 것이 총무원측의 단호한 결의인 것 같다. 하지만 무리한 개혁으로 '신앙의 표준화'를 낳게 되는 것만은 스스로 막아야 한다는 생각이다. 고광직 논설위원 kjk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