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기술이 급속히 발전하고 있는 데도 물리적 공간,즉 입지는 여전히 중요한 것일까. 얼핏보면 모순된 이 질문의 답은 분명히 '그렇다'이다. 우리가 미국의 실리콘밸리를 자주 인용하고 북유럽의 혁신거점이나 대만 이스라엘 인도 중국 등의 첨단기술 집적지를 부러워하는 이유만 생각해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최근 삼성경제연구소는 보고서를 통해 국내 벤처기업들이 활로를 찾으려면 '벤처 클러스터(cluster)'가 구축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대기업과 공생하는'클러스터가 필요하다면서 스웨덴의 시스타 사이언스파크,핀란드 오타니에미 파크 등을 대표적 사례로 들었다. 경쟁자 생산자 고객들의 다양한 종적ㆍ횡적 관계로 구성되는 지리적 집적체로서 경쟁과 협력,그리고 혁신이 어우러지는 클러스터는 사실 새삼스런 게 아니다. 벤처기업이 각광받던 시점에서는 더욱 활발히 제기됐던 이슈였다. 그럼에도 새롭게 들린다면 그것은 우리가 아직까지 제대로 된 혁신적 클러스터를 경험하지 못했다는 것과 결코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선진국과 경쟁국에 어떤 유형의 클러스터들이 있고,또 그 성공요인이 무엇인지를 꿰뚫고 있으면서도 왜 우리는 내세울 만한 클러스터가 없는 것일까.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어쩌면 '대기업과 공생하는' 벤처 클러스터가 필요하다는 주장,그 자체에서 중요한 단서를 찾을 수도 있다. 돌이켜 보면 우리의 벤처정책은 '벤처고립화'정책이나 마찬가지였다. 벤처기업들이 대기업을 대체할 것이라는 인식 자체가 그랬고,대기업이 신기술ㆍ신산업에 진출하려고 하면 벤처의 영역을 침범한다고 생각해 규제적 시각에서 접근한 것 등이 이를 말해준다. 그 결과 침체기에 들어서자 벤처의 다양한 탈출구만 봉쇄한 꼴이 됐다. 대기업의 인수합병이나 신기술ㆍ신산업 수요는 벤처기업에는 중요한 성장경로이자 시장인 데도 말이다. 이것이 다시 대기업의 경쟁력에도 부정적 영향을 미쳤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굳이 북유럽을 들먹일 이유가 없다. 남들은 없어서 안달하는 대기업을 요긴하게 활용할 생각부터 해야 한다. 대기업과 공생하거나 대기업이 주도하는 클러스터는 한국형 벤처 클러스터의 바람직한 모습일 수도 있다. 시각을 조금만 달리한다면 가까운 길이 바로 옆에 있다. 하루속히 대기업 정책이 달라져야 하고 규제도 혁파돼야 한다. 그것은 벤처를 살리는 길이기도 하다. 전문위원ㆍ경영과학博 ah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