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 다음의 거대한 물결은 정보기술과 바이오 기술이 만나는 곳에서 시작됩니다. 이 분야에서도 실리콘밸리는 기술에서는 물론 비즈니스에서도 세계를 선도할 것입니다" 헨리 로웬(Henry S.Rowen) 미국 스탠퍼드대학 경영대학원 명예교수 겸 아시아태평양연구소(P/ARC) 소장(76)의 '실리콘밸리 예찬'은 전혀 흔들림이 없다. 그 예찬은 72년부터 30여년간 스탠퍼드 교수로 실리콘밸리의 성장을 지켜보면서 쌓은 '실리콘밸리의 힘'에 대한 강한 믿음에서 나온다. 일흔을 훨씬 넘은 나이에도 실리콘밸리의 경험을 다른 나라에 접목하는 일에 매달리고 있는 그는 한국의 벤처 기업가들에 대해 "일에 대한 관심이 높고 경험이 많아 좋은 성과를 낼 수 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연구소가 있는 엔시나홀 3층 한켠에 자리잡은 3평 남짓한 그의 사무실 탁자 위에는 20여년전 파키스탄 국방장관에게서 선물로 받았다는 기마병 상이 놓여있어 국제문제 전문가로서의 그의 이력을 엿볼 수 있었다. -9·11 테러로 가뜩이나 어려운 미국 경제에 더욱 깊은 주름이 생겼다고 걱정하는 소리가 높습니다. 실리콘밸리 역시 이 사건 이후 더욱 움츠러드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실리콘밸리가 활력을 잃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실리콘밸리가 어려움에 빠진 이유는 크게 세가지를 들 수 있습니다. 전반적인 경기 침체에다 정보기술(IT)분야에 대한 투자 감소,인터넷버블의 붕괴이지요. 경기가 나빠지면서 IT분야에 대한 투자가 줄어든 것이 실리콘밸리에 결정적인 타격을 줬습니다. 그중에서도 통신분야에 대한 투자 감소가 핵심적인 요인입니다. 90년대에는 통신에 대한 투자는 정말 엄청난 규모로 이뤄졌어요. 과잉투자가 이뤄졌으며 통제 불능의 상태였지요. 그러하던 투자가 줄어들자 루슨트테크놀로지스 노텔 JDS유니페이스(광통신 부품제조업체) 등 통신장비업체들이 직접적인 타격을 받았습니다. 시스코시스템스처럼 라우터비즈니스를 하는 기업들도 마찬가지구요. 인터넷 비즈니스의 경우 많은 기업들이 생겨났지만 대부분 기술이 아니라 비즈니스 모델에 바탕을 둔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이같은 사업 방식은 결국 실패로 판명됐습니다. 그러나 이같은 시도는 충분히 의미는 있는 일입니다. 새로운 비즈니스에 대한 실험이란 면에서 상당한 기여를 했습니다. 또 일부는 생존하는데 성공하기도 했지요" -인터넷 버블 붕괴가 실리콘밸리에 미친 영향이 더욱 컸던 것 아닙니까. "실리콘밸리가 어려움에 빠진 이유로 세가지를 들었습니다만 인터넷 버블 붕괴의 영향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진짜 중요하고 큰 이유는 통신분야에 대한 과잉투자입니다. 이것에 비하면 인터넷 버블 문제는 아주 사소한 것입니다" -지난해 7월부터 실리콘밸리를 취재하고 있는데 날이 갈수록 활기를 잃어가고 있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창업도 그다지 활발하지 않은 것 같고 실리콘밸리의 활력소라 할 수 있는 벤처캐피털의 투자도 눈에 띄게 줄었습니다. 이런 상황이 계속된다면 실리콘밸리의 성장을 이끌어온 기술혁신이 주춤해지지나 않을까 하는 우려가 나오고 있습니다. "실리콘밸리가 요즘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이노베이션(기술 혁신)마저 약해진 것은 아닙니다. 새로운 아이디어가 끊임없이 나오고 있어요. 인터넷이 90년대의 커다란 물결이었으며 그 물결은 아직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인터넷에 뒤이은 거대한 흐름으로 IT와 바이오의 교차점을 손꼽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 분야가 조만간 실리콘밸리를 이끄는 새로운 기술로 자리잡을 것입니다" -실리콘밸리가 정보기술 분야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바이오 분야에서도 세계 기술을 선도하는 역할을 계속 할 수 있을 것으로 보시는지요. "물론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바이오 기술을 선도하는 기업이 여기에 있습니다. 제넨테크가 대표적인 회사입니다. 이 회사의 기본인 재조합 DNA(디옥시리보핵산) 기술은 바로 실리콘밸리의 대학에서 나왔습니다. UC 샌프란시스코에 재직하던 허버트 보이어 교수가 이 기술을 의약품 생산에 응용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고 지난 76년 제넨테크를 창업했지요. 스탠퍼드대학을 비롯한 실리콘밸리 대학들은 이 지역 바이오 기업들에 첨단 기술을 공급하고 있지요" -세계 여러 나라가 실리콘밸리의 성공 모델을 벤치마킹해 벤처기업 육성에 나서고 있습니다. 한국 역시 다양한 방식으로 벤처기업을 지원하고 있는데 아직 성공적이지 않은 실정입니다. 한국 벤처 기업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한국의 경제시스템은 최근에야 벤처기업을 창업하기에 유리한 방향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97년의 경제위기(IMF 관리체제에 들어간 것을 지칭)를 맞아 한국경제의 중요한 축이었던 재벌이 무너지면서 여기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창업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때부터 벤처기업이 급격히늘어났습니다. 한국은 지금 낡은 경제시스템이 빠른 속도로 변하는 단계에 있다고 봅니다. 여전히 대기업이 경제의 중요한 축을 담당하고 있고 벤처캐피털이 충분히 발달하지 않았습니다. 벤처기업의 기술원천인 대학도 아이디어를 제품으로 연결시키는데 소홀한 실정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벤처기업에 보다 호의적인 경제환경이 만들어지는 과정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한국경제가 새롭게 도약하는데 벤처 기업이 상당히 기여할 수 있다고 보는 것입니까. "코리아CEO 프로그램 첫 수강생을 뽑기 위해 면접을 했을 때 이들로부터 강한 인상을 받았습니다. 일에 대한 관심이 높고 경험이 많은데 놀랐습니다. 이들의 자질이 무척 뛰어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벤처기업에 대한 지원이 지속적으로 이뤄진다면 큰 일을 해낼 수 있을 것으로 봅니다" -이스라엘이나 대만은 첨단 기술분야에서 수많은 벤처기업을 길러내고 있어 한국이 본받아야할 모델로 평가되고 있습니다만. "이스라엘이나 대만 인도 등이 IT분야에서 상당한 성공을 거두고 있습니다. 기업가의 혁신 정신을 잘 살려주고 있다고 봅니다. 한국은 비교적 짧은 시간에 이같은 분위기를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 국가를 모델로 삼을 수는 없습니다. 여건이 다르기 때문이지요. 대만이나 이스라엘은 실리콘밸리와 모든 면에서 다릅니다. 보스턴 텍사스 오스틴 등 미국의 다른 첨단기술산업지역이 실리콘밸리와 다른 것처럼. 다만 한국이 이들의 사례를 참고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특히 대만을 집중적으로 연구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대만 기업들은 미국에서 오랜 경험을 가진 화교들과 긴밀한 연계를 갖고 실리콘밸리에서 개발된 기술을 들여다 재빨리 상품화해 시장에 접근하는 기동성을 갖췄습니다. 유명 브랜드를 가진 기업이 거의 없는데도 미국 시장에서 큰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비결이 바로 이것입니다" -스탠퍼드대학은 한국의 벤처기업 육성을 위해 여러가지 지원사업을 벌이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크게 두가지입니다. 하나는 한국 벤처기업의 최고경영자(CEO)들을 교육하는 '코리아CEO 프로그램'이며 다른 하나는 실리콘밸리의 성공 모델을 한국에 적용하는 방안을 모색하는 '스프리(SPRIE)프로젝트'입니다. 코리아CEO 프로그램은 매년 40명정도의 한국 벤처 기업가들을 스탠퍼드에서 2주간 교육하는 것으로 벤처 기업 경영에 관련된 내용을 사례 중심으로 교육하지요. 스프리는 아시아태평양연구센터 주관으로 실리콘밸리가 성공한 요인을 분석해 기술 자금 인력 등 기업에 대한 실리콘밸리 고유의 특징을 찾아내는 작업입니요. 지금부터는 실리콘밸리 고유의 기업환경이 외국에서는 어떻게 적용될 수 있을까를 따져보게 됩니다. 현재 한국 일본 중국 대만 싱가포르 인도 등의 전문가들과 협력,각국 벤처기업 단지의 현황을 조사하는 단계입니다. 이를 토대로 각국의 특성에 맞는 벤처기업 환경을 만드는 방법을 찾게 됩니다" 대담 = 정건수 실리콘밸리 특파원 ksch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