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山中閑談] (13) '활안 스님(천자암 조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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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파른 산길을 숨이 차고 목이 마르도록 오른 끝에 천자암에 도착했다.
천자암은 조계산의 여러 암자 가운데 송광사에서 가장 외떨어진 곳.
수곽(水廓.물받이통)에서 목을 축인 뒤 고개를 드니 외로 꼬인 아름드리 향나무 두 그루가 우뚝 서있다.
수령 8백여년의 천연기념물 제88호 "곱향나무 쌍향수(雙香樹)"다.
고려때 보조국사 지눌이 중국 천자를 만나고 오는 길에 짚었던 지팡이를 땅에 꽂았더니 자라났다는 나무다.
이 유서깊은 암자에서 이 곳 조실이며 조계종 원로의원인 활안(活眼.75)스님을 만났다.
노장(老長)의 처소인 염화조실(拈華祖室)에 들어서자 묵향이 그윽하다.
마침 선필(禪筆)을 쓰고 있던 탓이다.
선필을 마무리하고 다탁(茶卓) 앞에 앉은 노장에게 "방금 쓰시던 게 무슨 뜻이냐"고 물었더니 대답이 엉뚱하다.
"(종이와 글씨를 가리키며) 요거이(요것은) 흰 뜻이고 요거이 검은 뜻이여"
입을 열면 본뜻을 그르치니 언어·문자에 매이지 말라는 의미일까.
딱 부러지게 감을 잡지 못한 채 뜨악한 표정을 짓고 있는데 금세 할(喝·꾸짖는 소리)이 날아온다.
"너는 어째 직설(直說)은 모르고 가설(假說)만 좋아하냐"
그래도 뜻을 몰라 다시 물으니 돌아온 대답은 몽둥이에 가깝다.
"야,이 거지야.이런 것도 모르는 주제에 뭘 들으러 왔어.그냥 좋은 공기나 쐬고 가"
법문을 청하기도 전에 은산철벽(銀山鐵壁)에 부딪힌 느낌이다.
서울에서 불원천리(不遠千里) 찾아온 노력이 허사가 될 판이다.
이쪽의 난감함을 읽은 것일까,잠시 갑갑한 침묵이 흐른 뒤 노장은 "그래 점심은 묵었냐"며 짙은 남도 사투리로 말문을 연다.
"지혜와 복은 종교나 천지자연이 주는 것이 아녀.각자 생명이 타고난 성품을 밝게 하면 태양보다도 밝은 대우주의 무한한 지혜를 얻게 되지.각자 생명이 그런 원리를 다 타고 났어.따라서 짧은 한 생(生)에 할 일 중에 선후가 있으니 한 생각의 판도,즉 타고난 성품을 밝게 바꿔 놓는 것이 먼저여"
노장은 이것을 목표로 오늘까지 살아왔다고 했다.
그래서 그 타고난 성품을 바꿔놓았느냐고 물었더니 대답은 또 다시 할이다.
"네 놈은 바꿨다 해도 못알아 듣고 바꾸지 않았다 해도 못알아 들어.하나 하나 말,표정에 다 나타나는데 기다(그렇다) 해도 못알아 듣고 아니다 해도 못알아 듣고 그래.여기서 욕이나 얻어먹고 가"
역시 선사는 스스로 깨쳤다고 말하지 않는다.
다만 말 이전의 가르침으로 보일 뿐.활안 스님은 스무살 때인 1946년 월정사로 출가해 월산 스님(1912∼1997·전 불국사 조실)을 은사로 수행자의 길에 들어섰다.
'나고 죽는 일 이전의 나는 이 무엇인고(生滅未生前 是甚)'를 화두로 안거에 들기를 40차례.상원사 청량선원을 비롯한 전국의 선원을 답파했고 광양 백운산에서 움막을 짓고 수행한 지 4년 만에 오도송을 읊었다.
통현일할만기복(通玄一喝萬機伏·진리에 통하는 한 번의 할에 모든 사람이 엎드리니)
언전대기전법륜(言前大機傳法輪·말 이전의 커다란 움직임이 법륜을 전하네)
법계장월일장명(法界長月一掌明·법계를 비추는 달이 한 손바닥에 밝으니)
만고광명장불멸(萬古光明長不滅·만고의 밝은 빛이 길이 빛나네)
지난 75년부터 천자암에서 후학들을 지도해온 노장은 추상같은 수행가풍으로 유명하다.
매일 새벽 2시면 일어나 도량석,새벽예불,주인 없는 혼령(무주고혼)들을 위한 천도기도로 하루를 시작한다.
날이 밝으면 밭일 등의 운력에도 빠지지 않는다.
요즘도 직접 밭일을 하시느냐고 물었더니 노장은 "차라리 요새도 밥먹느냐고 묻지 그러냐"고 했다.
특히 천자암에 온 이후 매년 1백일간 방문을 잠그고 수행하는 '폐관(閉關)정진'은 뭇 선객들의 귀감이다.
"행복해지려면 타고난 성품이 단번에 다 밝아져야 해.마음도,보고 듣는 것도 밝아지면 시비할 것도 없고 내가 천지생명을 창조하고 관리하는 주인이 돼.어떻게 해야 밝아지느냐,그건 마음에 달렸지.견성대각을 해야지"
노장은 "한 생각을 돌리면 자성청정으로 탈바꿈한다"면서 "견성도 자기가 마음 정한대로 따라가는 것"이라고 했다.
산봉우리에 오르려면 고개를 넘고 내를 건너는 다리품을 팔아야 하고,깨달음을 구한다면 뼈에 사무치고 오장육부를 찌르는 대(大)의심으로 화두를 챙기라는 것이다.
"세간이나 출세간이나 마음과 노력이 균형을 이뤄야 빛이 나.생각만하고 노력하지 않으면 사기꾼이야.계약만 해놓고 실행하지 않는 것과 똑같지.국민들의 병이 다 거기에 있어.호랑이는 무서운데 가죽은 탐나는 꼴이지"
노장은 "상대방한테는 속아도 '나'한테는 속지 말라"고 했다.
희망도,고통도,행복도 원인은 나에게 있으니 자성(自性)을 밝히라는 당부다.
조계산을 내려오는 길,단풍으로 물들어가는 천지 자연은 이미 자성 그대로였다.
서화동 기자 fire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