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기업이 '죄악' 인가 ] SK그룹은 중.장기 발전전략의 하나로 4-5년 전부터 추진해온 신용카드 진출 계획을 보류했다. 당초 올해쯤 SK(주)와 SK텔레콤을 통해 2천억-2천5백억원을 투자, 기존 신용카드 회사를 인수하거나 신규로 카드회사를 설립할 예정이었으나 출자총액 제한이라는 규제 때문에 제동이 걸렸다. 현대자동차는 외국 지분이 50%를 넘어 경영권 안정을 위해서는 대주주(현대모비스) 지분의 확대가 필수적이나 역시 출자총액 제한에 묶여 애를 태우고 있다. 전국경제인연합회 조사에 따르면 삼성 LG SK 현대자동차 등 11개 그룹 39개 계열사가 공정거래법상의 출자총액 제한으로 인해 70여개 사업에 대해 신규 투자를 하지 못하고 있다. 실제로 투자를 계획했다가 추진하지 못한 투자 계획분만 5조원에 달한다. 출자제한에 묶일게 뻔해 아예 계획조차 세우지 않은 것까지 포함하면 그 규모는 10조원에 이른다고 전경련은 추정했다. 현 정부는 지난 97년의 외환위기 이후 경영투명성 제고와 지배구조 개선, 재무구조 건실화 등을 위해 대기업에 대한 각종 규제를 신설하거나 강화했다. 출자총액제한, 대규모 내부거래에 대한 이사회의결 의무화, 부채비율 2백% 이내로 억제, 사외이사 선임 의무화 등이 대표적이다. 물론 이중에는 시장 기능이 작동하게 하기 위한 것도 상당수 포함돼 있다. 문제는 투자나 자금 조달과 같이 기업 경영에 직접 개입하거나 대주주의 의결권 제한 등과 같이 국제 기준을 넘어 기업의욕 자체를 꺾는 규제가 그에 못지않게 많다는 점이다. 삼성경제연구소 분석에 따르면 국내 총 투자액의 약 25%를 차지하는 30대 기업집단의 설비 투자가 10% 축소되면 경제성장률은 약 1.5%포인트 정도 둔화된다. 대기업이 투자에 제한을 받고 있으니 경제가 활력을 회복할리 만무다. 정부는 기회 있을 때마다 BT(생명공학기술) NT(나노기술) 등의 미래사업 육성을 외친다. 장기간에 걸쳐 대규모 자금이 투입돼야 하는 이들 신(新)산업이 대기업의 적극적인 투자 없이 과연 가능하겠는가. 관변 연구소인 한국개발연구원(KDI)의 강봉균 원장까지도 "기업의 규모가 크다고 문제되는 나라는 어디에도 없다"며 투자활성화 등을 위해 출자총액제한은 푸는게 옳다고 말할 정도다. 유럽의 강소국(强小國) 네덜란드의 GDP(국내총생산) 대비 10대 기업 매출비중은 무려 1백78%(해외법인 매출포함)에 이른다. 한국(46%)의 약 4배다. 스위스(1백42%) 핀란드(70%) 스웨덴(65%) 등도 한국보다 대기업 비중이 훨씬 높다. 우리식 잣대로 보면 경제력 집중이 아주 심각해 대기업이 온갖 비난을 받아야 마땅하나 이들 나라 정부나 국민들은 그다지 문제삼지 않는다. 자원이 부족하고 내수시장이 협소한 나라일수록 국제무대에서 통하는 대기업을 육성해야 경제전쟁에서 이길 수 있다는 공감대가 형성돼 있는 때문이다. 한국의 대기업 정책이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는 여기서도 명확해진다. 전성철 세종대 부총장은 더 나아가 "기업은 끊임없는 투자를 통해 미래에 대비해야 한다"며 "문어발식 신규 투자가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분산 투자함으로써 불경기에 살아남을 수 있고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다는 것. 그는 세계 최고기업인 미국 제너럴 일렉트릭(GE)이 1980년대 들어 10년동안 3백83개의 새로운 기업을 인수하고 2백32개 기업을 매각한 것을 예로 들었다. 같은 기간 GE의 매출액은 2백70억달러에서 1천3백억달러로 급증하고 시가총액은 1백50억달러에서 5천억달러로 늘어났다. 과거와 달리 이제는 자본·상품시장이 모두 개방돼 대기업에 대한 규제(경제력 집중 억제)는 중소기업의 성장을 담보하는게 아니라 외국 기업에 우리 시장을 내주는 결과만 초래하기 십상이다. 중소기업 고유 업종처럼 돼 있던 자동차부품 1회용면도기 연필시장 등이 외국 기업의 수중으로 넘어간 것이 이를 잘 입증해 준다. 대기업은 글로벌 경제전쟁의 주력군이다. 대기업에 대한 규제는 가뜩이나 심각한 반대기업 정서를 부추기는 결과를 가져와 결국 스스로의 전력을 약화시킬 뿐이다. 김홍열 기자 comeon@hankyung.com ------------------------------------------------------------------------------ [ 특별취재팀 =이희주 산업부장(팀장) 박주병 손희식 차병석 김홍열 김용준 오상헌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