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창 '선운사'] 상사화 여린잎 길섶마다 애달픈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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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운사 골짜기에 가을이 와르르 몰려 있다.
사찰입구 누렇게 고개숙인 벼, 수줍게 하늘대는 키 큰 코스모스에 불꽃놀이 폭죽처럼 펑 터진 붉은 꽃잎의 상사화까지 한데 어울려 결실의 계절을 찬미하고 있다.
단풍들기 전에 찾은 선운사 길.
마침맞은 트레킹코스도 한결 길어진 듯해 기분좋은 올 가을 나들이의 흥을 돋운다.
상사화(꽃무릇)의 마중이 반갑다.
이즈음 선운사의 안주인 역할을 하는 상사화는 다년생 초본식물.
9월중순~10월초까지 만개, 선운사 골짜기를 붉게 물들이는 주인공이다.
극사실주의 기법으로 바위에 양각해 놓은 것 같은 들머리의 송악(천연기념물 367호)에서부터 2백m가량 떨어진 선운사 담벼락까지 평지형 계곡에 무리져 있다.
아직은 초록인 고목과 함께 명징한 계곡물에 어린 상사화의 붉은 색감이 묘한 가을분위기를 더해준다.
껑충한 연초록 대롱에 붉게 물들인 궁중 떠구지머리를 얹은 모습.
이름 때문인지 괜스레 애닯다.
꽃에 얽힌 전설도 애절하다.
옛날 불공을 드리러 온 여인이 스님 한분을 연모하다 손 한번 잡아보지 못한 채 상사병으로 지쳐 쓰러졌다.
그 자리에 피어난 꽃이 상사화라는 것.
봄에 자란 잎이 모두 떨어지면 꽃이 피어, 잎과 꽃이 서로를 영원히 보지 못한다는 특징이 상사화만의 비련미를 전한다.
대웅전(보물 290호) 뒤편의 동백나무숲(천연기념물 184호)으로 봄나들이의 명소가 된 사찰 선운사를 지나 본격적인 트레킹길에 오른다.
선운사~도솔암 3.2km의 길은 꽤 넓고 평탄해 걷기에 편하다.
울창한 숲은 터널을 이루고 있다.
상사화는 길섶을 따라 곳곳에 줄지어 앞선다.
문득 오른편 바위벽에 커다란 굴이 보인다.
진흥굴이다.
신라 진흥왕이 만년에 왕위를 버리고 도솔왕비, 중애공주와 함께 수도했다는 천연동굴이다.
바로 옆에 장사송(천연기념물 356호)이 있다.
수령 6백년으로 추정되는 28m 키의 소나무로 8개의 가지가 우산모양으로 펼쳐져 있다.
좀더 나아가면 도솔암(하도솔)에 닿는다.
선운사 들머리에서부터 50분.
도솔, 도웅이란 이름의 귀여운 강아지가 꼬리를 흔든다.
도솔암 북쪽 만월대의 서남쪽 바위에 내원궁(상도솔)이 자리하고 있다.
조선초기에 만들어진 지장보살좌상(보물 280호)이 모셔진 지장기도도량이다.
도솔암 왼편의 암벽 칠송대에 양각된 도솔암마애불(보물 1200호)은 국내 최대의 암벽불상이다.
치켜 올려진 눈꼬리와 굳게 다문 입술, 하얀 석회로 봉해진 명치끝의 감실 등은 선운사를 창건한 검단선사의 비결서와 동학혁명에 얽힌 이야기들을 선명히 되새기게 해준다.
예까지 왔으면 1km 떨어진 낙조대까지 올라볼 일이다.
오르막이 험한듯 하지만 잘 닦아놔 그리 힘들지 않다.
진안 마이산의 암벽과 비슷하게 보이는 바위벽이 이어진다.
돌아보면 한눈에 잡히는 선운산의 전경, 쫑긋 솟은 바위 사이로 서해바다와 하늘을 진홍으로 물들이는 낙조가 환상적으로 어울린다.
낙조대에서 내려오는 길.
캄캄한 어둠을 더욱 짙게 만드는 거대한 바람소리, 궤적을 종잡을수 없는 반딧불이의 비행은 선운사 여행에서 얻게 되는 또 하나의 기쁨이다.
고창=김재일 기자 kji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