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쇠를 다룬 대장장이는 담금질할 때 그 소리만 들어도 낫이 잘 들지 안들지를 알 수 있다고 한다. 또 망건을 만드는 노인이 말총 끝을 보지 않고도 바늘 구멍에 잘 꿰는 것도 평생 장인(匠人)정신으로 터득한 도(道)의 경지에 달한 때문일 게다. 고대 중국에서는 수공업에 종사하는 기능인들을 '천공(天工)'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들이 제작한 기물을 '천공개물(天工開物)'이라고 했다. 하늘의 뜻에 따라 제작된 기물이란 뜻으로 선택된 사람에게만 그 재질이 부여된다는 의미가 포함돼 있다. 기능인의 출발은 이렇게 시작되지만 왕조시대에 오면 기능인의 능력은 천한 기예로 전락해 버리고 만다. 옛날 우리나라에선 이런 장인바치를 공장(工匠)이라 불렀다. 삼국시대 이전에도 공장이 있었다는 것은 유물로 짐작할 수 있지만 제도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고려시대부터다. 당시의 공장은 세습제로서 중앙의 각 관아에 소속돼 있었다. '경국대전'에 보면 조선시대에는 관청에 속한 관장(官匠)과 사장(私匠)이 있었는데 서울에 거주하는 경공장이 1백30직종에 2천7백95명,지방관아 소속의 외공장이 27직종에 3천4백50명에 이른다. 이들의 신분은 원칙적으로 양인(良人)이어야 했다. 중종 이후 재정궁핍과 관료횡포 등의 이유로 관장제가 붕괴되기 시작하고 점차 사장이 그 역할을 대신하게 된다. 병기제조,왕실과 양반관료의 생활용품 장식품,백성의 농기구 생활용품 등을 생산했던 공장들은 익혀온 능숙한 손재주 하나로 산업역군의 역할을 해냈다. 엊그제 막을 내린 제36회 서울국제기능올림픽에서 한국이 4연패의 기록을 세웠다. 45개 직종 중 20개의 금메달을 따냈다니 대회를 휩쓸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물림한 손재주가 뛰어난 한국의 공장들이다. 한때는 금메달을 따면 카퍼레이드까지 벌였는데 언제부턴가 기능올림픽은 사회적 무관심 속에 빠져 버렸다. 아무리 지식사회니 정보화사회니 하지만 그 주춧돌은 역시 기능인이다. 기능인들이 '천공'이라는 자부심을 되찾아 신명나게 일하도록 정부나 기업은 물론 온 사회의 지원과 격려가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