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고어의 수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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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화가 마르셀 뒤샹(1887∼1968)의 작품 'L.H.O.O.Q'(1919년,19.7x12.4㎝,파리 개인소장)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 복제품에 염소 수염을 그려넣은 것이다.
코와 턱 밑에 약간의 수염을 덧붙였을 뿐인데도 화면 속엔 모나리자의 우아한 모습 대신 얌체같은 표정의 남자가 들어서 있다.
수염은 이처럼 사람의 얼굴을 송두리째 바꿔 놓는다.
턱수염이 없는 관운장이나 콧수염을 깎아버린 아인슈타인의 얼굴을 상상하기 어렵듯 링컨 대통령 역시 많은 사람들이 구레나룻 수북한,다소 못생겼지만 친근한 모습을 연상한다.
하지만 원래는 움푹 꺼진 눈과 뾰족한 주걱턱,튀어나온 광대뼈를 가진 강퍅한 인상의 소유자였다는 건 수염의 '힘'을 입증하는 대표적인 예로 꼽힌다.
편안한 이미지는 대통령이 되기 전 시골의 한 소녀가 보내준 편지 내용대로 턱과 볼에 수염을 길러 날카로운 느낌을 죽임으로써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이렇게 사람의 인상을 좌우하는 수염은 사춘기 이후에 생기는 제2차 성징이다.
자료에 따르면 고대 그리스나 로마의 일반 남자들은 수염을 안길렀고 이는 서구사회의 전통으로 이어졌다.
게르만족은 수염을 잘 다듬어 청색이나 녹색으로 물들였지만 로마시대 이후 그만뒀다.
우리나라에선 조선조까지 길렀고 1895년 단발령 이후 카이저수염이 잠시 유행했으나 1920년께부터 없어졌다.
지나치게 도회적이어서 정이 안간다는 평을 들어온 미국의 앨 고어 전부통령이 수염을 잔뜩 길러 마음 좋은 이웃집 아저씨같은 얼굴로 나타났대서 화제다.
TV의 영향력 때문에 겉으로 드러나는 이미지가 중시되는데다 고이즈미 일본 총리의 사자머리가 주목을 끈 탓인지 국내 정치인들도 헤어스타일을 바꾸거나 눈밑 지방과 검버섯을 제거하는 등 외모관리에 열심이라고 한다.
타고난 외양 때문에 대중에게 실제 성정과 달리 비쳐지는 건 억울하기 짝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정치인의 이미지는 깔끔한 얼굴이나 독특한 머리모양만으로 형성되지는 않는다.
고어의 수염이나 국내 정치인의 외관 가꾸기가 얼마나 효과를 거둘지 잘 지켜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