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2006.04.02 00:27
수정2006.04.02 00:29
아이들 뒷바라지를 걱정하던 주부가 캐릭터 업계의 "대모"로 변신했다.
캐릭터 업체인 위즈엔터테인먼트의 박소연(39) 대표는 몇 해 전만 해도 아침마다 반찬을 걱정해야 하는 전업 주부였다.
대학에서 산업미술을 전공한 그는 결혼과 함께 1986년 남편의 미국 유학길에 동행했다.
먼 이국 땅, 그의 관심은 오직 가족뿐이었다.
"사업요? 사업은 꿈도 꿔보지 않았어요. 그저 하루하루 사는데 만족했을 뿐이죠"
그러던 어느날 박 대표는 언젠가 돌아갈 한국에서의 생활을 생각하며 정체된 자신의 모습에 위기감을 느끼게 됐다.
그길로 중단했던 공부를 시작했다.
미국의 디자인 스쿨에서 연수를 하고 잃어가던 감각을 다시 되살렸다.
때마침 미국의 유명한 카드 회사인 아메리카 그리팅스에서 6개월동안 인턴 기회를 갖게 됐다.
1995년 미국에서 한국 기업체에 "구직신청"을 부지런히 날렸다.
마침내 박 대표는 팬시용품 업체인 바른손으로부터 "러브 콜"을 받았다.
첫 부임지는 일본.
우선 세계 캐릭터 시장을 이끌고 있는 일본 시장 분석 임무가 그에게 떨어졌다.
박 대표는 혼자 태평양을 건너 미국에서 한국이 아닌 일본으로 갈 수 밖에 없었다.
남편은 공부 때문에 미국에 남았고 아이들은 서울 친정에 맡겨졌다.
가족 걱정만 하던 억척 아줌마가 두 팔을 걷고 경쟁사회로 나선 것이다.
일본에서 1년간의 생활을 마치고 1997년 고국으로 돌아온 박 대표는 바른손의 캐릭터 사업부장으로 승진됐다.
바른손의 신임 여성 사업부장은 업무 파악이 끝나자 마자 영업 방법을 1백80도 바꿨다.
"당시 바른손은 제품을 만드는 데만 신경쓰고 어떻게 사람들에게 잘 알려서 수익을 극대화하느냐엔 관심이 없는 것 같았는데 완전히 바꾸어 버렸습니다"
바른손은 캐릭터 업계로선 처음으로 신문 광고를 했다.
"한국경제신문에 큰 광고를 하나 실었는데 하루에 전화가 5백통 넘게 와서 업무가 마비될 지경이었다"고 박 대표는 당시 상황을 전했다.
그러나 1997년 터진 국제통화기금(IMF) 직격탄을 바른손도 피해갈 수는 없었다.
회사측이 경영 정상화를 위한 여러 방안을 강구하는 가운데 박 대표는 경영자에게 캐릭터 사업부를 분리하는게 어떠냐는 제안을 했다.
제안은 받아들여져 박 대표는 "독립"에 성공해 1998년 위즈엔터테인먼트라는 간판을 올리게 됐다.
이렇게 탄생한 위즈엔터테인먼트는 토종 브랜드 개발에 힘입어 업계 수위를 다툴 정도로 성장해 있다.
김미리 기자 mir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