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복합위험사회'의 안전의식..장경섭 <서울대 사회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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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0년대 한국은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의 붕괴,대구·서울 지하철공사장의 폭발사고 등 갖가지 초대형 안전사고들이 잇따라 터져 온 세계에 '사고 공화국'의 수치스러운 이미지를 남겼다.
구조물 붕괴뿐 아니라 교통사고율 산업재해율 등 안전사고율이 세계 최고수준에 들어 있다.
인천 씨랜드 화재참사로 어린 자녀를 잃은 올림픽 메달리스트는 분노를 억누를 수 없어 메달을 반납하고 외국으로 이주하기까지 했다.
이같은 갖가지 위험요인 때문에 시민의 안전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위협받는 상황이 닥치자,서구의 '위험사회(risk society)' 논의가 한국 지식인들의 비상한 관심을 끌고 있다.
서구에서 두세기를 넘는 지속적 산업화와 경제성장으로 얻은 물질적 풍요의 이면에 사고와 재난의 일상화라는 반갑지 않은 현상이 나타났다.
서구인들은 원자력 관련 사고에서 유전자조작 식품의 해악에 이르기까지 발전의 결과로서 치러야 할 엄청난 비용에 직면해 있다.
그런데 이같은 각종 사고와 재난은 더 이상 우발적 사건이 아니라,일정 확률을 가지고 상시적으로 발생하는 일상성의 한 부분이라는 지적이 '위험사회론'이다.
'기적'으로 불리는 고속산업화를 통해 선진국 대열에 거의 합류한 한국은 위험사회 증후군 역시 앞당겨 경험하고 있다.
여기에 더해 초보적 안전관리의 미비로 후진국형 재해들이 계속된다.
장마가 오면 하천관리가 소홀한 도시들이 물에 잠기고,난개발로 인한 산사태로 마을들이 흙더미에 묻히는 일이 되풀이된다.
건설한 뒤 제대로 관리하지 않는 수많은 죽음의 도로들에서,만취 기사가 과속 운행한 대형버스들이 전복해 수십명의 사상자를 내는 일이 이어진다.
또 일상화 된 비리와 탈법 속에서 부실 시공된 건축·구조물이 붕괴돼 수많은 인명이 희생되는 등 '부패사회형' 재해가 널려 있다.
뿐만 아니라 무엇이든 단기간에 최대한 건설하고 생산하고 소비하려는 가운데 갖가지 재해도 압축적으로 경험하는 등 '속도사회형'재해가 잇따른다.
이러한 유형의 재해들은 한국의 독특한 발전경험과 결부된 '한국형' 재해이다.
부패사회형 재해는 삼풍백화점 사건에서 드러났듯이 공무원 전문가의 방조하에 기업인의 극단적 이윤욕이 작용해 발생하는 경우가 대표적이다.
속도사회형 재해는 세계 최고수준인 교통사고율이나 산업재해율에서 보듯이 적절한 안전관리 없이 이루어진 지나치게 빠른 생산·소비 활동의 증가에 의한 것이다.
한국은 이처럼 선진국형 후진국형,나아가 한국 특유형의 갖가지 위험요인이 동시에 작용하는 '복합위험사회(complex risk society)'로 규정할 수 있다.
한국이 복합위험사회가 된 것은 급속한 경제·사회적 발전으로 선진국형 재해의 발생이 불가피해진 이유도 있지만, 더욱 중요하게는 후진국형 및 한국형 재해가 좀체 줄어들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여러 첨단산업에서 세계 정상을 구가하고 있는 한국으로서 수치가 아닐 수 없다.
그동안 우리 사회에서 빈곤·복지 문제와 관련해 '선성장 후분배' 기조가 지배했던 것처럼,안전문제와 관련해 일종의 '선성장 후안전' 기조가 지배해 온 것이나 다름없다.
지하철 노동자들이 노동쟁의 방식으로 안전규정을 엄격히 준수하는 '준법투쟁'을 벌이면,정부는 사법처리를 위협하는 역설이 벌어지는 사회가 한국이다.
이러한 안전무시 인명경시의 개발지상주의 하에서 공무원 전문가 기업이 담합해 안전법규를 위반하며,설령 비리와 무책임이 드러나도 처벌은 형식에 그칠 뿐이다.
안전이 사회적 가치나 정치적 목표로 자리잡기가 요원한 상황에서 안전법규는 규제완화의 대상으로나 인식되고 있다.
21세기에 들어선 오늘날도 집중호우가 쏟아지면 수도 서울의 행인들이 가로등에서 누출된 전기에 감전사하는 실정이다.
하루하루의 생존이 요행인 사회에서 안전을 무시하고 추구하는 그 어떤 가치나 목표도 허영일 수밖에 없다.
안전은 최우선의 헌법적 권리며 시민적 상호의무다.
changks@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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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의 내용은 한경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