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가 숫자(數字)로 채워져 있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피타고라스의 후예가 된다. 7은 행운의 수, 12는 완전수, 3을 창조의 비밀과 관련된 수라고 생각한다면 역시 우리는 수비학(數秘學)에 입문할 준비가 돼있다고 볼 수 있다. 대우를 논하면서 이 수비학적 모티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IMF 체제가 개시된후 금융을 지배했던 비밀의 수는 8, 기업을 지배했던 마방진(魔方陣)의 해(解)는 200이었다. 은행의 죽고사는 것이 숫자 8(BIS비율)에 달렸고 퇴출과 생존의 갈림길에서 전전긍긍하던 기업들엔 200(부채비율)이 바로 저승사자를 의미했다. 우리는 오늘 또 하나의 숫자 500을 만나게 된다. 대우는 숫자 '500'에 사활을 걸었으나 그 때문에 결국엔 사지(死地)로 빨려들고 말았다. 무역흑자 5백억달러는 김우중 회장에게 사는 길이면서 동시에 죽는 길이기도 했다. 어떤 방향으로 가더라도 대우는 예정된 운명을 맞을 터였지만 처음에는 모든 것이 달라보일 뿐인 그런 마방진이었다. 김우중과 김우중 아닌 모든 자의 대립이기도 했던 '98년 무역흑자 5백억달러' 논쟁은 동시에 대우 몰락의 미스터리를 푸는 가장 명징한 해(解)이기도 하다. 청와대 재정경제부 산업자원부,급기야 IMF에 이르기까지 98년 무역흑자를 20억달러, 많아야 30억달러 이상으로 제시한 곳은 하나도 없었다. 오직 김우중만이 5백억달러 무역흑자론을 제안했다. 정부가 제시한 20억달러의 스물다섯배. 구경해본 적도 없는 규모였다. 그러나 98년이 끝났을 때 김우중이 절대 옳았다는 것이 드러났다. 그해 한국의 무역흑자는 3백94억달러였다. 김 회장의 말대로 조금만 더 밀었다면 5백억달러가 전혀 '불가능'한 것도 아니었다. 문제는 바로 이것이 대우 몰락의 출발점이었다는 사실이다. '5백억달러 흑자론'은 다름 아닌 '대우의 생존전략'이었다. 무역금융과 외상수출의 악순환이 운명의 철차를 밀어갔고 이 과정에서 18조원의 부채가 늘어났다. 성공의 길은 곧 실패의 지름길이기도 했다. 김 회장은 극도의 자금난을 오직 무역금융을 통해 절묘하게 타고 넘을 계획이었다. [ 특별취재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