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패션디자이너들에게 뉴욕은 욕망의 도시다. 뉴욕 무대에서의 데뷔는 바로 디자이너로서의 화려한 미래를 보장받는 열쇠가 되기 때문이다. 오브제뉴욕의 윤한희(38) 사장. 그는 지금 뉴욕발 욕망의 열차를 타고 있다. 뉴욕 패션협회로부터 올가을 정기컬렉션의 공식 초청장을 받은 것이다. 뉴욕에서 패션쇼를 연 한국인 디자이너는 몇몇 있지만 현지 패션협회로부터 공식 초청을 받은 경우는 그가 최초인 셈이다. 연매출 8백억원에 이르는 유수 패션업체의 경영자면서 한편으론 세계무대 도약을 꿈꾸는 그의 변신을 이제 눈여겨볼 때다. 63년 서울생. 안정된 집안의 1남3녀중 막내딸로 응석받이가 될 법한 환경이었다. 그러나 부모님의 엄한 교육 덕분에 매사에 똑 부러지고 자립심 강한 성격으로 자랐다. 학창시절, 커서 하고 싶은 일도 많았다. 그렇다고 패션디자이너가 되겠다는 상상은 꿈에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림 그리는 걸 특별히 좋아한다거나 옷만들기를 취미로 삼는 소녀는 더구나 아니었다. 그러다보니 전공도 디자인관련이 아닌 어문학과를 택해 83년 외국어대에 입학했다. 그런 그에게 생각지도 못했던 "운명"이 다가왔다. 같은 과에 늘 특이하게 옷을 입고 다니며 패션디자이너를 꿈꾸는 남학생과 친숙해지면서부터였다. "그와 친해지면서 저 역시 디자이너라는 직업에 매력을 갖게 됐어요" 당시 윤 사장에게 첫 눈에 반해 쫓아다니던 남학생이 바로 지금의 남편이자 사업동반자인 강진영(38)씨. 대학 졸업 직후 두 사람은 곧 결혼했다. 그리고 86년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늦깍이 학생인 만큼 공부가 쉽지는 않았다. 부족한 기초를 메우기 위해 한겨울 새벽시간 찬물에 머리를 담그며 공부시간을 늘렸다. 시침핀으로 입체재단 연습을 너무 많이 해 손가락에 피멍이 든 경우도 부지기수였다. 샌프란시스코의 디자인스쿨인 FIDM에서 3년간의 혹독한 수업을 마치고 귀국한 그는 90년 의류회사 논노 샤트렌에서 첫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실력도 어느 정도 인정받았다. 그러나 자신의 아이디어를 마음껏 펼치는데 한계를 느껴 3년뒤 창업을 결행했다. 남편 강진영씨도 동행해 주었다. 서로가 표현은 하지 않았지만 안정된 직장을 버린다는 두려움은 떨쳐버릴수 없었다. 창업이래야 강남 신사동에 15평짜리 조그마한 옷가게를 내는 것이었지만 자금에서부터 필요인력 구하기 등 도처에 난관이 뒤따랐다. 매장 이름은 오브제(Obzee), 제품 컨셉트는 당시에는 볼 수 없었던 화려한 스타일로 정했다. 90년대 초반 국내 패션업계는 평범한 디자인에 값이 싼 기성복시장과 특이한 스타일을 추구하지만 값비싼 디자이너브랜드 시장으로 양분돼 있었다. "특별한 디자인의 옷을 사고 싶지만 주머니가 가벼운 소비자는 갈 곳이 없었어요. 오브제는 바로 그 수요를 겨냥했습니다" 그러나 의욕과 달리 반응이 신통치 않았다. 과감한 디자인 덕분에 구경꾼이 다소 있기는 했다. 하지만 사서 입기는 다들 주저했다. 말 그대로 "공치는" 날이 부지기수였다. 디자이너로 데뷔도 못해 보고 이대로 주저 앉을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수시로 엄습했다. 무엇인가 문제는 분명히 있었다. 그는 지금까지 갖고 있던 디자인에 대한 모든 고정관념을 버리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제3자의 시각에서 자신의 제품을 다시 냉정하게 바라봤다. "내가 만든 제품들이 사실은 외국디자이너 제품을 거의 베낀 유형이라는걸 그때서야 알았어요. 제 스타일에 자신을 잃고 매출만을 의식했던 거죠" 그런 결론을 얻은 순간 그는 매장 행거에 걸려 있던 수십벌의 옷들을 모두 수거, 내다버렸다. 살을 도려내는 듯한 아픔이었다. 그리고 다시 드로잉을 시작했다. 자기가 가장 잘 만들 수 있는 디자인으로 다시 손님을 기다렸다. 6개월을 넘기며 반응이 오기 시작했다. 시간이 가면서 유명 해외브랜드만을 선호해온 연예인과 패션리더들도 하나둘씩 오브제 매장을 찾기 시작했다. 94년에는 롯데 갤러리아 등 대형 백화점에 매장을 냈다. 특히 문턱 높기로 유명한 롯데백화점이 신생브랜드 오브제에 자리를 내주자 관련업계에선 의외로 받아들였다. 당시 오브제를 유치했던 강희태 롯데 여성복 팀장은 "윤 사장의 옷에 대한 열정과 냉철한 판단력을 보고 선뜻 입점을 결정했다"고 전했다. 몇날 밤이고 마음에 드는 디자인이 나올때까지 매달리는 열성, 또 수백장의 제품을 공장에서 만든 다음에도 완제품이 성에 차지 않으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모습에서 신뢰하게 됐다는 얘기다. 오브제는 백화점 입점 직후부터 여성복 코너의 매출 1위 브랜드로 자리잡았다. 전국에 "공주옷 열풍"을 일으키며 화제가 되기도 했다. 97년 선보인 두번째 브랜드 오즈세컨 역시 런칭하자마자 성공가도를 달리기 시작했다. 93년 3억원에 불과했던 매출은 95년 2백억원,惻?娩?7백억원을 기록했다. 사업에만 몰두하는게 아니다. 그는 끊임없이 공부하는 디자이너로도 잘 알려져 있다. 시간이 날 때는 대학에서 자주 특강도 하고 그 자신이 개발한 디자인을 놓고 활발한 토론도 벌인다. 뉴욕패션협회로부터의 초청도 바로 이런 과정을 통해 완성된 그만의 독특한 디자인 세계가 인정받은 것으로 주변에서는 보고 있다. "사실 돈을 벌 욕심이라면 좀더 쉬운 길을 택했겠죠. 실제로 아동복이나 남성복을 만들자는 제안도 많이 받았고요. 그러나 고객에 의해 한국을 대표하는 디자이너로 키워진 만큼 세계 무대로 뛰어보자는 결론을 내렸어요" 그가 올 가을, 세계 패션산업의 메카인 뉴욕에서 선보이는 옷은 단순히 지금까지 국내에서 볼 수 있었던 옷들이 아니다. 오브제와 오즈세컨에 이은 제3의 브랜드를 미국땅에 심겠다는 야심아래 새로운 디자인제품들을 선보일 계획이다. 현지법인인 오브제뉴욕은 그래서 만들어졌다. 뉴욕팀을 꾸린지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잠복했던 난관은 곳곳에서 돌출되고 있다. 매장공사 인부들과의 커뮤니케이션부터 수출쿼터문제까지 어느 것 하나 녹록지 않다. 동양인, 그것도 작은 나라 한국의 디자이너에 대한 일반적 편견도 그가 극복해 내야 할 과제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요? 물론 있어요. 하지만 갖가지 천과 부자재를 조합해 옷을 만들어 내듯 운명도 내가 디자인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미리 스케치해 보고 꼼꼼히 소재를 챙기면 더욱 멋진 옷을 만들수 있지 않을까요?" 그의 머릿속에는 이미 세계 일류 디자이너로서의 삶이 디자인돼 있는 듯하다. 설현정 기자 so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