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징의 미국계 기업에서 중간관리자로 일하고 있는 엔샤오펑(嚴曉豊.38)씨. 미국 본사 발령을 받은 그에게 요즘 고민이 한가지 있다. 1년 전 은행 대출을 받아 산 승용차가 문제였다. 당시 그의 푸캉(富康)자동차(1.4ℓ)가격은 15만위안(1위안=약1백60원). 다소 부담됐지만 은행에서 돈을 대준다기에 선뜻 샀다. 출국을 앞둔 그가 최근 자동차를 팔기 위해 중고시장에 갔을 때 차는 애물단지로 변했다. 가격이 폭락했던 것. 같은 차종 신차는 10만위안으로 떨어졌고, 1년짜리 중고가는 7만위안 받기가 어려웠다. 그는 "가격이 더 떨어질 것이라며 헐값에 내놓으라는 얘기만 들릴 뿐 매입자는 찾기 어렵다"며 "1년 간 자동차를 끄는데 무려 8만위안이 들었다"고 허탈해 했다. '옌씨의 자동차 이야기'는 가격자율화 정책의 산물이다. 중국은 지난 5월 말 승용차에 대한 가격고시 제도를 철폐,시장의 수급상황에 따라 업체가 결정하도록 했다. 공급이 수요를 크게 웃도는 상황에서 자동차 가격은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옌씨는 시장을 잘못 읽어 낭패를 본 것이다. 승용차뿐만 아니다. 중국은 최근 정부가 간섭했던 1백17개 상품의 가격을 자율화했다. 현재 정부가 가격에 관여하는 것은 품목은 전기 군수품 비료 등 13개에 불과하다. 이는 곧 정부-기업관계의 근본적인 변화를 보여준다. 정부는 기업을 통제하는 대신 그들이 시장에서 자유롭게 경쟁하도록 도와주는 감시자 역할로 물러나고 있다. 정부의 '보이는 손' 대신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이 힘을 얻고 있는 것이다. 세계무역기구(WTO) 가입을 앞둔 중국 정부의 기능은 이렇게 변하고 있다. 요즘 중국 언론에 '독점을 포격하라(砲打壟斷)'는 말이 자주 등장한다. 계획경제 체제의 유물이 독점을 근절하겠다는 정부의 의지를 표현한 말이다. 이 정책에 따라 통신 항공 석유화학 등의 거대 독점업체들이 분리되고 있다. 국가가 관여했던 사업은 기본적인 것만 빼놓고 모두 떼어 민간으로 넘기겠다는 게 중국 정부의 정책이다. "중국 정부 역시 시장 관리자로 물러서야 한다는 압력을 받고 있습니다. 정부의 산업에 대한 독점 역시 포격의 대상입니다. 정부는 이제 기업이 자유롭게 경쟁할 수 있도록 분위기를 만들어주는 '분위기 메이커'에 만족해야 합니다. 중국은 정부가 빨리 물러날 수록 시장 메커니즘이 더 빨리 살아날 것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장웨이잉 베이징대학 교수) 시장혁명은 경쟁의 시작이다. 정부의 보호 울타리를 벗어난 기업들은 지금 생사를 걸고 시장쟁탈전을 벌이고 있다. 지금 살아남지 못한다면 영원히 시장에서 퇴출될 거라는 위기의식 때문이다. 가전 분야가 대표적인 케이스다. 일부 가전업체는 업체간 치열한 가격파괴 경쟁을 이기지 못해 시장에서 퇴출될 위기를 맞았다. 베이징의 '명동'으로 불리는 왕푸징(王府井)의 백화점에 가면 '에어컨 10% 특별 세일'이라는 현수막을 흔히 보게 된다. 일부 상점은 올림픽을 구실로 앞으로 7일간 5% 특별 할인을 내걸기도 했다. '독점포격'소식이 전해지면서 항공업계에도 가격경쟁이 벌어지고 있다. 정부가 주요 항공업체간 가격 카르텔에 비난을 가한 게 시발점이었다. 이와 함께 각 항공사들은 손님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치열한 서비스 경쟁을 벌이고 있다. 대표적인 계획 산업이었던 항공업게에 시장메커니즘이 살아나는 것이다. 기업 활동에 간섭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정부. 국가의 보호막에서 벗어난 기업. 이들이 지금 WTO가입이후 중국의 경쟁력을 만들어가고 있다. 더 이상 계획경제라는 잣대로 중국을 봐서는 안되는 이유다. 베이징=한우덕 특파원 woodyha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