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무령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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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공주시 금성동에서 1971년 7월5일 우연히 발견된 백제 25대 무령왕(武寧王·재위 501~523)의 능은 백제문화의 진수로써 백제연구에 촉매역할을 했어야 할 일대 사건이었다.
무령왕릉 발굴을 '20세기 한국고고학 최대의 발굴'이라고 일컫는 까닭도 그런데 있다.
왕릉에서 출토된 유물은 왕과 왕비의 지석,금제관식 금제귀고리 금동신발 금제팔찌 용봉대도 등 모두 108종 2천9백6점에 이른다.
유물 가운데 '영동대장군백제사마왕(寧東大將軍百濟斯摩王)'이라 분명하게 명기된 지석은 백제 30명의 왕들중 유일하게 무덤의 주인을 알려준 가장 귀중한 사료가 됐다.
영동대장군은 중국 양(梁)나라의 무제(武帝)가 내린 벼슬이고 사마는 무령왕의 이름이다.
신라왕릉들도 주인공을 몰라 '천마총''금관총'이라 부르고 있는 형편에서 획기적 발견이었다.
왕과 왕비의 사망 연월일,능에 모셔진 날짜,60세와 30세라는 나이도 지석에서 밝혀졌다.
사망후 3년 뒤에야 능에 모셨던 당시의 장례풍속도 확연히 드러났다.
무령왕릉은 벽돌로 축조된 건축적 가치,부장유물의 미술적 가치,사마왕에 대한 사료적 가치 등 백제문화의 진수를 보여주고 있는 유일한 자료일뿐 아니라 중국에서 유행하던 무덤축조형식이나 중국 백자등잔과 청자,일본 규슈지방산 삼나무로 짠 목관 등은 백제와 중국 일본과의 특별한 교류를 짐작케 해주고 있다.
무령왕릉에 대한 연구는 고작 이 정도를 알아내는데 그쳤다.
고고학자들이 초기백제 유적발굴에만 열을 올린 탓일까.
하룻밤 새인 12시간만에 끝낸 미숙한 발굴이 귀한 정보를 사멸시켰고 발굴보고서도 엉터리였다며 발굴참여자들이 자책하고 있지만 이미 지난 일이다.
무령왕릉발굴 30주년을 맞아 공주에서는 대규모 출토유물특별전(26일~7월22일),고분특성과 당시 국제관계를 구명하는 학술대회(7월 6~7일 무령왕과 동아시아 세계)를 개최한다는 소식이다.
백제사연구에 획을 그을 만한 연구결과가 나올지 주목거리다.
그렇지 못하다면 30년이 지난 지금부터라도 연구에 박차를 가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