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은 줄곧 민주화 이후 출범한 정부들의 화두가 됐다.

최근 정부가 스스로 평가한 6공5과에도 개혁에 관한 것들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요즘 개혁피로감 개혁추수론이 정부여당에서 설왕설래되고 있어 의아심을 자아낸다.

개혁의 당위를 외치던 당당함은 어디가고 개혁추수론이 등장하는가.

세계화시대에 한국이 살아남으려면 개혁이 지속돼야 하는데 개혁피로감이라니….

아닌게 아니라 사람들은 개혁에 지쳐 있고,개혁에 신물을 내고 있는 것 같다.

국민연금제도부터 시작해 교육개혁 의료개혁 등 모두 홍역을 치르면서 오늘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총론에서 보면 개혁의 필요성은 자명하다.

우리는 이른바 ''한국병''을 앓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왜 개혁에 지쳐있는 것일까.

개혁의 대상들이 집단이기주의에 빠졌기 때문일까.

준비 안된 개혁을 서둘렀기 때문일까.

개혁의 목표가 잘못됐기 때문일까.

혹은 개혁을 추진하는 사람들이 단견과 오만함의 포로가 됐기 때문일까.

물론 이들 모두 개혁피로감의 원인이지만,특히 현 정부 개혁주의자들의 자세와 방법론의 문제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개혁을 추진하는 사람들은 정치권력을 장악했다는 이유만으로 갑자기 수술하는 의사로 부상하고,일반 국민들은 중병을 앓고 있는 환자의 처지로 전락했다.

현 정부 출범 이후 추진된 개혁은 사회의 모든 구석구석을 휘젓고 다니는 전방위개혁이었다.

초보의사가 환자에게 하는 것처럼 일방적인 진단과 밀어붙이기식 처방이었다.

개혁의 대상이 된 사람들은 ''촌지받는 교사'' ''10년 된 강의노트를 사용하는 교수'' ''제약회사로부터 돈받는 의사'' ''세금을 포탈하는 언론사'' 등 영락없이 중죄를 지은 죄인이고,오직 개혁을 추진하는 세력만이 독야청청한 세력이었다.

이처럼 온 국민을 대상으로''한국병''을 치료하는 의사로 자부한 정부의 독선과 오만함이 오늘날 개혁피로를 부르지 않았을까.

그러나 ''한국병''을 앓고 있는 한국사회에서 유독 정부여당이라 해서 건강하다고 할 수 있으랴.

과연 누가 개혁의 주체이고 누가 개혁의 객체인가.

설사 의사로서 ''한국병''을 치료하는 처방에 임한다고 해도 환자가 회복해 갱생의 삶을 찾는데 있어 환자의 삶의 의지는 중요하다.

암환자의 경우에도 환자 스스로의 삶의 의지가 없다면 의사의 처방은 백약이 무효다.

그러나 현 정부의 개혁주의자들은 병을 없애기 위해서는 환자의 사기와 품위는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설사 병을 없앤다고 해도 개혁의 대상이 된 조직들의 자생력이 온전할 수 있을까.

그것은 마치 곱사등을 없애겠다고 곱사등이를 엎어놓고 홍두깨로 내려치는 발상과 유사하다.

곱사등은 펴지겠지만 정작 곱사등이는 죽지 않겠는가.

또 개혁주의자들은 개혁이란 불확실성을 향한 도전이라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우리는 불확실성 세계에 살고 있다.

이 불확실성은 특히 사실적 인과관계의 불확실성에서 현저하다.

무너지는 공교육,잘못된 의료현실,바닥난 의보재정,경쟁력 떨어지는 대학,과외열풍 등 잘못된 한국사회를 보면서 누가 그 인과관계에 대해 확실히 알고 있는가.

현실세계는 하나의 원인과 하나의 결과가 연계돼 있는 단순한 세계가 아니라,하나의 결과는 또 다른 현상의 원인이 되는 복잡계,즉 순환의 세계다.

물론 순환은 선순환과 악순환으로 이루어져 있다.

흔히 개혁의 의제가 되는 것은 악순환의 문제이며,이 악순환을 선순환으로 바꾸는 것이 개혁의 과제다.

그럼에도 개혁주의자들은 공교육의 부실과 약의 오남용문제에 대해 교원 정년단축,의보재정 통합,의약분업 등 단순한 인과론에 의한 해법으로 대처했다.

개혁추진 과정에서 마치 ''고르돈의 매듭''을 단 칼에 풀었던 알렉산더 대왕처럼 한국사회의 난제들을 일거에 해결할 수 있다고 과신한 나머지,다양한 의견을 청취하기보다 밀실에서 소수의 사람들이 개혁의제를 정한 다음 밀어붙였던 것이다.

개혁에 대한 이의 제기나 항의는 충언보다는 집단이기주의로 낙인찍혔다.

바로 이것이 개혁피로감의 본질이다.

정부여당은 이 점을 겸허하게 인정하고 대책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parkp@snu.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