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영풍토를 바꾼다 ]

"ERP(전사적 자원관리) 시스템을 한국식으로 변형시켜야 한다"

"안된다. 회사 조직이 ERP를 그대로 수용해야 한다"

지난 98년 볼보가 삼성중공업 중장비 사업부문을 인수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내부에서 불거진 논란이다.

당시 삼성 출신 직원들은 한국 현실에 맞도록 시스템을 개조하자는 주장이었던 반면 볼보측은 경영효율을 극대화하기 위해선 타협해서 수정할 수 없다고 버텼다.

삼성측이 ''변형''을 주장한 배경에는 과거 재벌들의 정치권 비자금 제공파동에서도 나타났듯이 회사에는 모든 직원들이 알아서는 안될 ''비밀''도 있을 수 있다는 ''한국적 상황''을 고려한 측면이 강했다.

그러나 볼보측은 강경했고 결국 회사의 모든 현금흐름과 재무상황은 1백% 경영정보시스템의 통제를 받게 됐다.

"볼보에선 일단 어떤 시스템이 도입되면 거의 반영구적으로 적용됩니다. 선진적이라거나 첨단적이라는 표현보다는 ''수미일관'' ''초지일관''이라는 말이 더 어울립니다"(볼보 김희장 과장)

리서치 부문에서 국내 증권사를 압도하고 있는 외국 증권사들의 글로벌스탠더드도 따지고 보면 단순하고 우리가 익히 알고있는 내용들이 대부분이다.

프랑스계인 크레디리요네(CLSA)증권의 김현기 조사담당 이사는 "솔직히 말해 분석기법에 있어 한국 증권사의 애널리스트들과 별로 다른게 없다"고 털어놓는다.

"크게 다른 점이 있다면 애널리스트의 독립성이 보장되고 애널리스트들은 고객의 요구를 한발 앞서 충족시켜 주는 것"이란다.

경영층의 입김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국내 증권사들과 차별화되는 대목이다.

외국계 증권사는 여기에다 엄격한 내부통제 및 위험관리 시스템(컴플라이언스 제도:Compliance)을 도입해 고객들의 신뢰를 얻고 있다.

세계적인 생산자동화 업체인 로크웰 오토메이션 한국지사는 국내 진출 10년 만인 작년에 3백50억원의 매출을 올리며 안정적으로 자리잡았다.

이 회사의 김병준 기술영업이사는 "업무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기술직 직원들의 모든 가정에 홈오피스 장비를 제공했다"며 "기존 접대 위주의 영업문화를 개선하면서 선물은 ''주지도 받지도 말자''는 원칙을 확고히 세웠다"고 말했다.

은행으로 넘어오면 외자계의 스타일은 국내와 확연히 구분된다.

많이 달라졌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국내은행들은 보수적인 연공서열과 하향 평준화적인 평가시스템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다.

JP모건 체이스은행의 한 외환딜러는 "몇년전 국내은행에 근무할 때는 고유 업무 외에 잡무를 처리하는 시간이 너무 많았다"면서 "체이스로 옮기고 나서는 정보 취득과 수익 관리에만 신경을 쓸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국내은행 출신인 씨티은행 영업관계자도 "내부 지원체계가 오로지 일 중심으로 짜여져 있어 쓸데 없이 시간을 허비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고 말했다.

전국에 21개의 할인점을 갖고있는 한국까르푸의 심광현 상무도 "연공서열 등 한국식 관행을 완전히 근절해 유능한 인재들이 마음놓고 일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놓았다"며 은근히 자부심을 내비쳤다.

한국적 풍토와의 갈등으로 낭패를 당하는 사례도 드물지 않다.

쌍용제지를 인수한 미국 P&G의 경우 여성생리대 등에서 세계적인 ''톱 파워''를 한국에선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이를테면 소매상을 일일이 상대하는 사업특성상 수많은 제품배달 차량들이 도로불법주차로 스티커를 자주 발부받을 수밖에 없다.

이 때 P&G는 ''한국식''으로 단속반원과 ''타협''하지 않고 ''미국식''을 고집했다.

매일같이 적발을 당하더라도 현장에서 옥신각신하거나 타협하지 말고 꼬박꼬박 과태료를 내라는 것.

한국적 풍토를 무시한 이런 외곬 글로벌스탠더드는 시장점유율 하락으로 이어졌다.

''세계 어디서나 같은 맛''을 모토로하는 맥도날드 햄버거가 토종인 롯데리아를 절대로 이기기 힘들다고 결론이 난 것도 ''글로벌스탠더드''의 한계를 말해준다.

반대로 얼마전 병원비리수사 때 세계최고 의료장비업체들이 줄줄이 뇌물수수혐의로 걸려들었던 데서 보듯이 한국적 풍토에 좋든 싫든 타협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 기획취재부 오춘호.조일훈.장경영 기자 ohchoo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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