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더라도 거짓이 없어야한다''는 도산 안창호 선생의 말씀을 좌우명으로 삼아 올곧게 살아왔다고 생각합니다"

26일 단행된 개각에서 대통령 복지노동수석비서관에 전격 임명된 이태복(51)씨는 평생을 일관된 철학 아래 살아온 ''노동운동의 대부''다.

서울 용산시장 지게꾼에서 출발해 노동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사형 구형까지 받고,또 특별 사면으로 풀려난 뒤로도 노동문제 전문 일간지를 발행하는 등 그의 인생은 철저히 노동운동으로 점철돼 있다.

이 때문에 한국노총과 민주노총 등 노동계는 "현장을 잘 아는 사람이 임명됐다"며 일제히 환영의 뜻을 나타냈다.

하지만 일부에서는 그를 ''급진적인사''로 보기도 한다.

6·25전쟁이 나던 해 충남 보령에서 태어난 그는 국민대 법대 2학년 재학 시절 반독재민주화운동으로 제적된 후 74년 용산시장 지게꾼을 시작으로 전국 노동현장에서 소그룹 활동을 펼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운동 방식이 지닌 한계와 대학 졸업 학력은 그를 현장 노동운동가에서 이론교육가로 변신하게 만들었다.

얼굴을 맞댄 교육보다는 책을 통해 많은 동지를 규합할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한 것이다.

그는 77년 도서출판 광민사를 차려 노동문제입문서인 ''한국노동문제의 구조''''영국노동운동사''''노동의 역사'' 등 20여권의 노동서적을 잇달아 출판했다.

이 가운데 ''노동의 역사''는 대학생과 노동자들이 몰래 탐독했던 사회과학입문서적으로 80년대 학생운동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70년대말에는 전국민주노동자연맹을 조직해 △노동3권 완전보장 △8시간 노동제 실시 △최저임금제 쟁취 등을 목표로 활동했다.

동시에 전국민주학생연맹을 중심으로 노동자와 학생이 연계한 ''노학연대'' 전술을 제시하는 등 적극 투쟁론을 견지했다.

81년 전두환 정권이 전국민주노동자연맹 수사에 나서면서 경찰에 검거된 그는 고문경관 이근안씨로부터 두달동안 온갖 고문을 받은후 기소돼 사형이 구형됐으나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복역에 들어갔다.

하지만 앰네스티인터내셔널이 이씨를 ''세계의 양심수''로 선정하고 86년부터 국제적인 석방운동에 들어감에 따라 그에게는 다시 노동운동에 나설 수 있다는 희망이 보이기 시작했다.

또 김수환 추기경과 강원룡 목사,윤보선 전 대통령 등의 적극적인 석방 노력이 더해지면서 그는 88년10월,복역 7년4개월만에 풀려날 수 있었다.

89년부터는 언론을 노동활동의 새로운 방법으로 택했다.

주간 노동자신문을 창간했으며 99년7월에는 노동문제 종합 일간지인 노동일보를 창간해 회장에 취임했다.

지난 96년부터는 사회복지단체 ''인간의 대지'' 대표를 맡아 가난하고 어려운 이웃들에 대한 관심과 애정도 펴보이고 있다.

새로운 시도와 도전을 좋아해 ''맹글이''란 별명을 가진 이 수석은 앞으로 어떤 정책을 펼치겠느냐는 질문에 "급진적인 정책보다는 객관적인 입장에서 합리적인 정책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그는 출소후 뒤늦게 노동운동가 출신인 심복자(44·현 노동일보 편집인)씨와 결혼했다.

김도경 기자 infofes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