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침에] 일본은 무엇을 꿈꾸는가 .. 이주향 <수원대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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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의 연이란 이상한 것이다.
작은 우연으로도 만나 아픈 사연, 깊은 사연, 버리고 싶은 사연, 버릴 수 없는 사연을 만들며 생의 중심이 되는 것을 보면.
그 남자와 그 여자도 그렇게 만났다.
목숨같은 사랑이 아니라 하찮은 우연으로.
여자는 정신대라는 것을 피하기 위해 부랴부랴 혼인이라는 걸 했다.
남자는 강제징병으로 끌려가기 전 대라도 이어야 한다는 집안의 뜻을 따라 부부의 연을 맺었다.
정이 들 새 없는 남자였지만, 하나밖에 없는 남편이기도 해서 여자는 매일매일 정화수를 떠놓고 기도를 드렸다.
남자가 무사히 돌아오게 해달라고.
전쟁이 끝났는데 남자는 돌아오지 않았고 당연히 여자의 기도도 끝나지 않았다.
돌아와야 할 남편이, 아들이 돌아오지 않았으므로 여자의 기도는 더욱 더 간곡해졌다.
어머니의 점집 돌아다니는 발걸음은 더 잦아졌다.
대부분은 죽었다고 했다.
그러나 죽은 아들을 본 적이 없는 어머니는 아들의 죽음을 믿기 싫었다.
당연히 아들이 죽었다는 점쟁이들을 돌팔이로 만들었고, 아들이 살아있다고 말해 줄 용한 점쟁이를 찾아 점집순례를 했다.
그런 점집순례는 아들을 잃은 어머니의 유일한 희망이기도 했다.
아직도 돌아오지 않은 이가 바로 내 어머니의 숙부다.
아들을, 남편을 잃어버린 외가에선 웃음도 죄가 되었다.
오로지 무거운 엄숙함과 슬픔만이 그 집안 삶의 빛깔이었다.
한반도를 침략하고 침략전쟁까지 일으킨 일제는 떠났지만, 남은 자들의 망가진 삶은 여전히 악몽의 연장이었던 것이다.
일제가 부당하게 한반도를 침략하지 않았어도 강제징병이나 징용이 있었을까?
침략전쟁의 욕망으로 들끓지 않았어도 그 남자의 혼이 구천을 헤맸을까?
반이상이 피죽음이 된 채로 원혼조차 돌아오지 않는 그 길.
그 길이 징용길이고 징병길이고, ''처녀공출''이라고 불렀던 위안부길이었다.
그것이 일본이 ''아시아 독립전쟁''이라고 적고 싶어하는 침략전쟁의 그림자다.
그것이 가까운 과거에 일본과 우리 사이에 있었던 엄연한 역사다.
한반도의 전통을 끊어먹고 한반도의 아들 딸들에게 회복하기 어려운 상처를 남긴 그 엄연한 사실을 그들은 침략이 아니라 ''대륙진출''이라고, 침략전쟁이 아니라 ''아시아해방전쟁''이라고 적고 싶어한다.
한반도 36년 간의 강제통치가 국제관계 원칙에 따라 합법적으로 행해졌다고 기술하는 그들과 어떻게 미래를 함께 할 수 있을까?
36년 간의 통치가 합법이고 정당한 거라면 독립운동은 불법이고 부당한 것이 되는데.
도대체 일본이 진실에 장례를 치르고 얻으려 하는 것은 무엇인가?
자신감인가, 고립인가?
그 허위에 찬 자신감으로 ''대륙진출''이라는 이름의 또다른 침략을 꿈꾸고 있는 것은 아닌지.
개인사에서도 힘은 있지만 자기중심적인 사람과는 살기 힘들다.
자기중심적인 사람이 힘이 있으면 그 힘은 그 만큼 파멸의 힘이 되기 때문이다.
하물며 역사에서랴.
이정빈 외교통상부장관은 ''잘못 처리될 경우 한.일 우호관계에 큰 손상을 줄 우려가 있다''고 경고했다.
중국의 반응에 대해선 촉각이 곤두선 일본이 우리에 대해선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일각에선 한국은 상대할만한 대상이 아니라는 무시론(無視論)이란다.
힘이 없으면 무시하는 일본, 그래서 힘에 따라 진실이 달라질 수 있다고 믿는 일본.
마침 여야의원 1백여명이 단순한 경고가 아닌 힘이 있는 대안을 내놨다.
일본대중문화 개방일정을 전면 재검토하고, ''천황'' 호칭을 재고하며, 한.일의원연맹활동을 중단하자는 국회결의안을 제출한 것이다.
아마 그 핵은 일본대중문화 개방일정 전면 재검토일 것이다.
정부는 이를 최대한 뒷받침해야 한다고 믿는다.
대중문화를 개방하고 문화를 공유한다는 것은 미래를 함께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위안부 문제는 발뺌하고, 1년에 한번씩 연중행사처럼 독도는 자기네 땅이라고 억지를 쓰고, 자라나는 청소년에겐 왜곡된 역사를 가르치고, 일본으로 가져간 우리 문화재는 돌려줄 생각조차 없는, 그런 민족과 어떻게 문화를 함께 할까?
JA1405@chollian.net
작은 우연으로도 만나 아픈 사연, 깊은 사연, 버리고 싶은 사연, 버릴 수 없는 사연을 만들며 생의 중심이 되는 것을 보면.
그 남자와 그 여자도 그렇게 만났다.
목숨같은 사랑이 아니라 하찮은 우연으로.
여자는 정신대라는 것을 피하기 위해 부랴부랴 혼인이라는 걸 했다.
남자는 강제징병으로 끌려가기 전 대라도 이어야 한다는 집안의 뜻을 따라 부부의 연을 맺었다.
정이 들 새 없는 남자였지만, 하나밖에 없는 남편이기도 해서 여자는 매일매일 정화수를 떠놓고 기도를 드렸다.
남자가 무사히 돌아오게 해달라고.
전쟁이 끝났는데 남자는 돌아오지 않았고 당연히 여자의 기도도 끝나지 않았다.
돌아와야 할 남편이, 아들이 돌아오지 않았으므로 여자의 기도는 더욱 더 간곡해졌다.
어머니의 점집 돌아다니는 발걸음은 더 잦아졌다.
대부분은 죽었다고 했다.
그러나 죽은 아들을 본 적이 없는 어머니는 아들의 죽음을 믿기 싫었다.
당연히 아들이 죽었다는 점쟁이들을 돌팔이로 만들었고, 아들이 살아있다고 말해 줄 용한 점쟁이를 찾아 점집순례를 했다.
그런 점집순례는 아들을 잃은 어머니의 유일한 희망이기도 했다.
아직도 돌아오지 않은 이가 바로 내 어머니의 숙부다.
아들을, 남편을 잃어버린 외가에선 웃음도 죄가 되었다.
오로지 무거운 엄숙함과 슬픔만이 그 집안 삶의 빛깔이었다.
한반도를 침략하고 침략전쟁까지 일으킨 일제는 떠났지만, 남은 자들의 망가진 삶은 여전히 악몽의 연장이었던 것이다.
일제가 부당하게 한반도를 침략하지 않았어도 강제징병이나 징용이 있었을까?
침략전쟁의 욕망으로 들끓지 않았어도 그 남자의 혼이 구천을 헤맸을까?
반이상이 피죽음이 된 채로 원혼조차 돌아오지 않는 그 길.
그 길이 징용길이고 징병길이고, ''처녀공출''이라고 불렀던 위안부길이었다.
그것이 일본이 ''아시아 독립전쟁''이라고 적고 싶어하는 침략전쟁의 그림자다.
그것이 가까운 과거에 일본과 우리 사이에 있었던 엄연한 역사다.
한반도의 전통을 끊어먹고 한반도의 아들 딸들에게 회복하기 어려운 상처를 남긴 그 엄연한 사실을 그들은 침략이 아니라 ''대륙진출''이라고, 침략전쟁이 아니라 ''아시아해방전쟁''이라고 적고 싶어한다.
한반도 36년 간의 강제통치가 국제관계 원칙에 따라 합법적으로 행해졌다고 기술하는 그들과 어떻게 미래를 함께 할 수 있을까?
36년 간의 통치가 합법이고 정당한 거라면 독립운동은 불법이고 부당한 것이 되는데.
도대체 일본이 진실에 장례를 치르고 얻으려 하는 것은 무엇인가?
자신감인가, 고립인가?
그 허위에 찬 자신감으로 ''대륙진출''이라는 이름의 또다른 침략을 꿈꾸고 있는 것은 아닌지.
개인사에서도 힘은 있지만 자기중심적인 사람과는 살기 힘들다.
자기중심적인 사람이 힘이 있으면 그 힘은 그 만큼 파멸의 힘이 되기 때문이다.
하물며 역사에서랴.
이정빈 외교통상부장관은 ''잘못 처리될 경우 한.일 우호관계에 큰 손상을 줄 우려가 있다''고 경고했다.
중국의 반응에 대해선 촉각이 곤두선 일본이 우리에 대해선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일각에선 한국은 상대할만한 대상이 아니라는 무시론(無視論)이란다.
힘이 없으면 무시하는 일본, 그래서 힘에 따라 진실이 달라질 수 있다고 믿는 일본.
마침 여야의원 1백여명이 단순한 경고가 아닌 힘이 있는 대안을 내놨다.
일본대중문화 개방일정을 전면 재검토하고, ''천황'' 호칭을 재고하며, 한.일의원연맹활동을 중단하자는 국회결의안을 제출한 것이다.
아마 그 핵은 일본대중문화 개방일정 전면 재검토일 것이다.
정부는 이를 최대한 뒷받침해야 한다고 믿는다.
대중문화를 개방하고 문화를 공유한다는 것은 미래를 함께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위안부 문제는 발뺌하고, 1년에 한번씩 연중행사처럼 독도는 자기네 땅이라고 억지를 쓰고, 자라나는 청소년에겐 왜곡된 역사를 가르치고, 일본으로 가져간 우리 문화재는 돌려줄 생각조차 없는, 그런 민족과 어떻게 문화를 함께 할까?
JA1405@chollian.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