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고 싶었습니다] 서두칠 <한국전기초자 사장> ..'되돌아 본 그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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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두칠 한국전기초자 사장은 직장생활을 농협에서 시작했지만 대우그룹에 경력사원으로 입사하면서 "기업문제 해결사"로 능력을 발휘했다.
76년 대우중공업에 입사,전국 사업장을 돌면서 중공업 관리기반을 만들어냈다.
인사와 관리분야에서만 10년 동안 몸담으면서 "열린 경영"이라는 노무관리의 성공 비결을 체득했다.
85년 7월부터는 92년 12월까지 대우전자 상무로 근무할 당시에도 노사관계를 전담했다.
당시 이 회사의 구미 인천 공장 등 대표적인 분규 사업장의 노조를 "평정"하며 회사를 정상화시켰다.
그가 말하는 "평정"수단은 근로자와 직접 접촉을 통한 설득.77일간 파업을 벌인 한국전기초자를 정상화 시킨 것도 이 때 "열린 경영"의 효과를 몸으로 깨달았기 때문이다.
"직원들을 경영이해 집단으로 만드는 작업이 중요합니다. 강성 노조는 회사가 직원들을 경영에서 소외시킬 때 만들어집니다"
평소에 회사의 사정을 솔직하게 털어놓고 협조를 구하지 않은 채 임금협상때만 회사가 어렵다고 하면 어떤 노조도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그가 강조하는 한국식 구조조정의 원칙은 심(心).정(情).기(氣).직원들의 마음을 편안하고 따뜻하게 복돋워주고 열심히 일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서 사장이 최고 경영자로서의 명성을 쌓기 시작한 것은 93년 대우전자부품을 맡으면서부터.그는 이 회사에 4년 동안 근무하면서 영국 멕시코 폴란드 베트남 중국 등지에 7개의 해외 사업장을 건설했다.
그는 해외법인을 설립하기에 앞서 현지 근로자를 국내에 데려와 6개월~1년동안 기술을 습득시킨 후 해외로 내보내는 관리방식을 사용했다.
국내 사업장도 이들 저임 노동력 덕분에 원가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렇게 길러낸 기술 인력들은 현지 공장의 초기 안정화에도 크게 기여했다.
사업 첫 해부터 흑자를 내는 일석이조 효과를 거두며 당시 대우가 추진한 "세계경영"이 뿌리내리도록 했다.
대우에 입사한 후 8년 동안 만년 이사로 있던 그가 초고속 승진을 시작한 것도 이때.93년 상무에서 94년에는 전무로,95년에는 부사장으로 매년 진급했다.
회사의 실적도 좋아졌다.
당시 대우전자부품의 주가가 대우그룹 상장사 8개중 가장 높았다.
지난 98년 대우가 워크아웃에 들어갔을 때도 대우전자부품은 자산실사 결과 자산이 부채를 초과한 유일한 기업이었다.
그가 97년 12월 한국전기초자로 옮긴 것도 당시 김우중 그룹회장이 "해결사"로서 그의 능력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단 1년만에 회사를 안정시킨 서 사장은 그러나 대우그룹의 자금난으로 전기초자가 2천억원에 매각되면서 23년간 "대우맨"의 생활을 끝냈다.
이는 대우의 인수금액 4백억원보다 5배나 많은 금액.단 1년만에 기업가치를 5배나 끌어올리며 대우에 1천6백억원을 되돌려주는 것으로 대우에 마지막 "봉사"를 한 셈이다.
이심기 기자 sglee@hankyung.com
76년 대우중공업에 입사,전국 사업장을 돌면서 중공업 관리기반을 만들어냈다.
인사와 관리분야에서만 10년 동안 몸담으면서 "열린 경영"이라는 노무관리의 성공 비결을 체득했다.
85년 7월부터는 92년 12월까지 대우전자 상무로 근무할 당시에도 노사관계를 전담했다.
당시 이 회사의 구미 인천 공장 등 대표적인 분규 사업장의 노조를 "평정"하며 회사를 정상화시켰다.
그가 말하는 "평정"수단은 근로자와 직접 접촉을 통한 설득.77일간 파업을 벌인 한국전기초자를 정상화 시킨 것도 이 때 "열린 경영"의 효과를 몸으로 깨달았기 때문이다.
"직원들을 경영이해 집단으로 만드는 작업이 중요합니다. 강성 노조는 회사가 직원들을 경영에서 소외시킬 때 만들어집니다"
평소에 회사의 사정을 솔직하게 털어놓고 협조를 구하지 않은 채 임금협상때만 회사가 어렵다고 하면 어떤 노조도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그가 강조하는 한국식 구조조정의 원칙은 심(心).정(情).기(氣).직원들의 마음을 편안하고 따뜻하게 복돋워주고 열심히 일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서 사장이 최고 경영자로서의 명성을 쌓기 시작한 것은 93년 대우전자부품을 맡으면서부터.그는 이 회사에 4년 동안 근무하면서 영국 멕시코 폴란드 베트남 중국 등지에 7개의 해외 사업장을 건설했다.
그는 해외법인을 설립하기에 앞서 현지 근로자를 국내에 데려와 6개월~1년동안 기술을 습득시킨 후 해외로 내보내는 관리방식을 사용했다.
국내 사업장도 이들 저임 노동력 덕분에 원가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렇게 길러낸 기술 인력들은 현지 공장의 초기 안정화에도 크게 기여했다.
사업 첫 해부터 흑자를 내는 일석이조 효과를 거두며 당시 대우가 추진한 "세계경영"이 뿌리내리도록 했다.
대우에 입사한 후 8년 동안 만년 이사로 있던 그가 초고속 승진을 시작한 것도 이때.93년 상무에서 94년에는 전무로,95년에는 부사장으로 매년 진급했다.
회사의 실적도 좋아졌다.
당시 대우전자부품의 주가가 대우그룹 상장사 8개중 가장 높았다.
지난 98년 대우가 워크아웃에 들어갔을 때도 대우전자부품은 자산실사 결과 자산이 부채를 초과한 유일한 기업이었다.
그가 97년 12월 한국전기초자로 옮긴 것도 당시 김우중 그룹회장이 "해결사"로서 그의 능력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단 1년만에 회사를 안정시킨 서 사장은 그러나 대우그룹의 자금난으로 전기초자가 2천억원에 매각되면서 23년간 "대우맨"의 생활을 끝냈다.
이는 대우의 인수금액 4백억원보다 5배나 많은 금액.단 1년만에 기업가치를 5배나 끌어올리며 대우에 1천6백억원을 되돌려주는 것으로 대우에 마지막 "봉사"를 한 셈이다.
이심기 기자 sg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