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회에 심각한 신뢰 위기가 다가오고 있다.

이 신뢰 위기는 과거의 외환위기나 금융위기와 달리 소리 소문 없이 스며들고 있다.

하지만 그 여파는 한국인 모두에게 오랜 기간 두고두고 파급될 수 있어 경제 위기보다 해악이 훨씬 클 것으로 우려된다.

◆곳곳에서 울리는 경고음=지난 97년 태국의 외환위기를 가장 먼저 감지한 곳은 태국 은행들이었다.

이들은 위기 도래 대략 반년 전부터 내국인 상대 대출금까지도 외화 표시로 내주어 위기가 오고 있음을 예고했었다.

신뢰 위기도 마찬가지다.

이 역시 내부 사정에 가장 정통한 사람이 먼저 알게 돼 있다.

이와 관련해 지난해 11월 여야 국회의원들은 한국에 불신의 골이 깊어지고 있다고 입을 모았었다.

지난 3일 ''성숙한 사회 가꾸기'' 운동을 시작한 3백여명의 사회 지도층 인사들 역시 ''신뢰 상실''이 우리 사회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라는 데 이견이 없었다.

천주교 김수환 추기경도 신뢰 회복을 현 정권의 최우선 과제로 최근 지목했다.

한국의 신뢰 위기에 관한 경고는 국제사회에서도 잇따라 제기되고 있다.

지난 8일 제프리 존스 주한 미국상공회의소 회장은 신뢰 부재가 한국의 가장 큰 문제라며 "한국 사람들은 나만 이겨 살아남으려고 생각하는데 그런 전략으로는 거래가 지속될 수 없다"고 경고했다.

지난해 아르헨티나에서는 한국인들이 ''가장 싫은 외국인 2위''로 꼽혔고 인도네시아에서는 각종 법규 위반으로 강제 추방된 외국인으로 한국인이 1위를 기록했다.

최근 멕시코의 유력 일간지 ''레포르마''는 한국 이민사회에 대한 특집기사에서 "멕시코시티 후아레스 구역은 여러 국가 이민들이 사이좋게 공존하는 지역이었으나 한국인들이 들어온 뒤부터는 이웃간 정이 깨진 불만이 가득한 지역이 됐다"고 성토했다.

이 신문은 더 나아가 "한국인들은 공존하기가 매우 어려운 민족"이라고까지 하며 한국인에 대한 불신과 거부감을 드러냈다.

◆경제위기보다 두려운 신뢰위기=미국 남가주대학의 워런 베니스 교수는 20세기의 생존 밑천이 ''파워''였다면 21세기의 그것은 ''신뢰''라고 역설했다.

이는 20세기가 계급사회의 시대였다면 21세기는 네트워크 사회이기 때문이란 것이다.

즉 20세기 사고방식은 ''난 네 보스니까 넌 나를 믿을 수 있어''라든지 ''넌 내 부하니까 난 너를 믿어''였다.

인간적 신뢰의 바탕이 없어도 상하관계만으로 신뢰는 바로 생겨났다.

그러나 21세기 사람들에겐 정해진 통로를 따라 신뢰와 정보가 일사불란하게 흐르는 상하 계급관계가 없다.

모두가 팀제로 일한다.

네트워크는 수평적이고 어디로든 통한다.

인간관계는 비공식적이며 정해진 룰도 없다.

종래 계급적 권력으로 행해지던 일은 이제 전적으로 사람간 신뢰로써 이뤄져야만 하게 됐다.

일감 자체도 개개인의 신뢰와 네트워크에 따라 생겨나고 사라진다.

따라서 21세기 사회에서는 신뢰를 잃을 때 모든 것을 잃게 된다.

이는 한 국가,또는 한 민족 차원에서도 마찬가지다.

신뢰 위기가 경제 위기보다 두려운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런데 제프리 존스 회장을 비롯한 외국 유력 인사들은 지금 한국에 믿을만한 기업이 ''10곳 정도나 될까''하며 갸우뚱하고 있다.

실제로 영국의 시사주간지인 이코노미스트는 일본 장기 불황을 신뢰 상실로 설명하고 있다.

일본 경제,특히 일본 증시는 ''불신이란 독약''을 먹고 죽었다는 게 이코노미스트의 진단이다.

예컨대 일본 국민들은 어째서 금융 자산의 90% 이상을 이자 한푼 붙지 않는 은행예금에 넣어두고 있는가.

많은 사람들이 이를 일본인의 위험기피 성향으로 이해하지만 이코노미스트의 시각은 전혀 다르다.

즉 일본 국민들도 처음에는 다른 선진국 국민들처럼 주식과 채권 투자에 관심이 많았으나 기업들과 증권사,투신사,그리고 정부에 거듭 속는 과정에서 이를 철저히 불신하게 됐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제 은행까지 불신당할 때가 곧 일본 경제 몰락의 시점이라는 설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