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 처음 옥내 무대형 극장인 협률사(協律社)가 생겨난 것은 1902년의 일이다.

고종의 하사금으로 지은 이 왕립극장은 3년만에 문을 닫아야 했다.

그뒤 1908년 이인직(李人稙)이 이 극장을 임대해 원각사(圓覺社)로 재출발한다.

원각사에 앞서 1907년 ''북촌''에서 문을 연 극장이 단성사(團成社)다.

뒤이어 남성사 연흥사 조선극장 우미관 등 한인 극장이 ''남촌''의 일본인전용극장인 어성좌 황금좌 희락관 대정관에 맞서 속속 개관됐다.

한 기록에 따르면 광복직전에 약 1백80개의 극장이 있었다고 한다.

단성사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극장이다.

안창묵 이장선이 합자해 세운 이 극장은 본래 2층의 목조건물이었다.

당시의 모든 극장이 그랬듯 처음에는 창무 재담 판소리 탈춤 창극 신파극 등을 공연했다.

여러번 소유주가 바뀌었으나 1918년 광무대 소유주인 박승필(朴承弼)이 인수하면서부터 영화전용관이 되다시피 했다.

박승필은 1919년 ''의리적 구투''라는 연극과 영화의 복합형태인 연쇄극을 제작해 단성사 무대에 올렸다.

극영화는 아니지만 영상미를 추구한 최초의 영화제작 시험무대라는 평가를 받는 작품이다.

그래서 1919년을 한국영화사의 기점으로 잡는 학자도 있다.

그는 또 일본영화만 득세하던 시절 한국영화제작의 재정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나운규는 재정적 도움을 가장 많이 받은 인물이다.

1923년 아예 단성사에 영화사를 차리고 ''장화홍련전''을 제작한 것은 한국영화에 대한 그의 애정을 엿보게 한다.

단성사가 오는 9월 헐린뒤 2003년 지하 5층 지상 12층의 복합상영관으로 재탄생한다는 소식이다.

''겨울여자''''장군의 아들''''서편제''등 국내 명화를 비롯 수많은 외국 수작들을 단성사에서 관람한 영화팬들에게는 이처럼 서운한 소식도 없을성 싶다.

단성사는 우리 연극 영화의 역사를 상징하는 명소였다.

영화 상영관과 연극 뮤지컬 오페라 공연장으로 남게 되는 것만도 그나마 다행이다.

법고창신(法古創新)한다는 뜻에서라도''단성사''란 이름만은 영원히 지켜갔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