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세영 현대산업개발 명예회장, 자서전 '미래는...'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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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영 현대산업개발 명예회장(72)이 자신의 32년 자동차 인생을 고스란히 담아낸 자서전 "미래는 만드는 것이다"를 출간했다.
정 명예회장은 "포니에서 그랜저까지" 한국 자동차산업을 어떻게 개척해왔는지를 자서전에 진솔하게 기술하고 있다.
현대자동차의 탄생과 함께 시작했던 자동차인생을 뒤로 하고 지난 99년 현대산업개발 회장으로 자리를 옮길때의 사연과 다소 섭섭했던 심정도 솔직하게 드러냈다.
''포니 정(Pony Chung)''으로 불리며 한국경제의 한 페이지를 장식해온 정 명예회장은 "나는 오직 자동차만을 생각하고 자동차를 위해 살아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며 "오늘날 다시 생각해 봐도 자동차는 내 분신과 같은 소중한 존재"라고 술회했다.
그는 자서전에서 우선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정주영 전 현대명예회장과의 관계를 비롯한 가족이야기,사업을 추진하면서 정부와 겪었던 갈등,예기치 못한 병마를 이겨낸 이야기 등을 소개했다.
강원도 통천에서 8남매 중 넷째 아들로 태어난 그는 어릴 때부터 큰 형인 정주영 전 현대명예회장이 자신에게 말할 수 없이 큰 존재였다고 기술했다.
그는 "어머니는 늘 장독대 앞에 정화수를 떠 놓고 신령님께 큰 형님의 축복을 빌었다"며 "부모님의 영향으로 ''큰 형님이 잘돼야 우리 집안이 잘된다''는 의식이 머리속 깊숙이 자리잡았다"고 어린 시절을 회고했다.
''큰 형님 위주''의 사고방식은 무척이나 엄격했던 아버지의 뜻이었다면서 "나를 포함한 나머지 형제들은 큰 형님의 결정이나 의사에 반하는 것은 상상할 수 없었고 큰 형님의 말 한마디는 곧 법이었다"고 밝혔다.
정 명예회장은 고려대 정치학과에 다니던 청년시절을 되돌아보면서 "당시 나의 주도로 모의국회를 준비했었는데 큰 형님이 필요한 모든 자금을 쾌척해 줬다"며 "이 때 어려운 가운데서도 일을 추진하면서 느낀 성취감은 억만금을 줘도 바꿀 수 없는 귀중한 경험"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미국에서 정치학 석사를 마치고 귀국했을 때 교수나 정치가의 꿈을 꾸기도 했지만 "사업을 함께 하자는 큰 형님의 제의를 거부할 수 없었다"고 사업에 뛰어든 배경도 설명했다.
정 명예회장은 결혼한지 1년이 지난 1959년 10월께 ''간경변증''이라는 진단을 받으면서 인생에서 처음으로 큰 시련을 만났다.
체중이 눈에 띄게 줄고 머리도 거의 다 빠져 한눈에 병세가 위중하다는 걸 알아 차릴 정도였다.
그는 "간이 점점 굳으면서 오그라드는 병으로 거의 간암으로 발전한다는 말에 사형 선고를 받은 느낌이었다"고 당시를 되돌아봤다.
절망에 빠져 있던 그에게 새 삶의 용기를 심어준 것은 그의 아내와 큰 형님이었다.
그는 "아내가 없었다면 자신은 병마와의 싸움을 결코 이길 수 없었을 것"이라며 "또 동생 걱정으로 새벽에 산삼을 들고 큰 형님이 나타났을 땐 말을 이을 수 없었다"고 회고했다.
자서전엔 1986년 말 정주영 당시 현대그룹회장이 자신에게 그룹회장을 맡으라고 한 이유를 그때로서는 전혀 알 수 없었다는 대목도 들어있다.
그는 "1987년을 며칠 앞두고 큰 형님이 갑자기 불러 그룹회장을 맡으라고 했다"면서 "환갑이 되는 1년 6개월 이후에 시키는대로 하겠다"며 처음엔 제의를 사양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1987년 초 또 다시 불러 "애들을 회장시켜야겠는데 그러자면 네가 자동차 회장과 그룹회장을 맡아야 모양이 서지 않겠냐"고 물어 같은해 2월 그룹회장에 취임하게 됐다고 전했다.
그는 "큰 형님이 그룹 회장직을 내놓은 데는 또 다른 중요한 목적이 있었는데 그것이 정계 진출이었다는 것을 그룹회장에 취임한지 2~3년 지나고서야 감을 잡기 시작했다"고 술회했다.
특히 1990년에 접어 들면서 "큰 형님이 정계진출을 구상중이라는 소문이 돌자 경제계 내부에서 조차 ''현대와의 거리를 유지하라''는 ''암호메시지''가 나돌았다"고 당시 분위기를 설명했다.
정 명예회장은 5공화국 시절 평화의 댐 공개입찰과 6공화국 당시 올림픽대교 공사에서 현대가 불이익을 받은 것은 모두 ''큰 형님''의 정계진출과 관련된 것이었다고 보고 있다.
그는 "그룹회장에 취임한 후 정부는 현대에 무지막지한 세무사찰을 벌여 1천3백억원을 추징해 갔다"며 "현대가 맡았던 청와대 신축공사의 공사비도 당초 예산의 두배인 4백50억원이 들었지만 청와대가 압력을 넣어 공사비를 포기토록 종용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소송을 제기했지만 결국 김영삼 정부 때 소송을 취하했다"면서 "농담반 진담반으로 청와대의 반은 현대 것이라는 말을 하곤 한다"고 덧붙였다.
1999년 3월 32년간 함께했던 현대차를 떠날 때 정주영 전 현대명예회장과 나눴던 대화도 비교적 소상히 기술돼있다.
당시 정주영 전 현대명예회장이 정세영 명예회장의 아들인 정몽규 부회장을 계속 자동차에 근무토록 하겠다는 뜻을 보였지만 다음에 또 곤혹스러운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함께 자동차를 떠나겠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는 32년간 몸담았던 회사를 ''떠나라''는 한마디에 그만두고 나서 "형님이 늘 남들에게 나를 오너(owner)라고 소개했었기에 내가 정말 오너였는지 전문경영인이었는지 몇번이고 자문했다"고 밝혔다.
정 명예회장은 "32년 동안 자동차회사를 경영해 오면서 ''정도경영''을 소신으로 삼아왔다"고 회고하고 "원칙을 지키는 경영을 지향하면 어떤 시련도 이길 수 있다"며 책을 맺었다.
류시훈 기자 bada@hankyung.com
정 명예회장은 "포니에서 그랜저까지" 한국 자동차산업을 어떻게 개척해왔는지를 자서전에 진솔하게 기술하고 있다.
현대자동차의 탄생과 함께 시작했던 자동차인생을 뒤로 하고 지난 99년 현대산업개발 회장으로 자리를 옮길때의 사연과 다소 섭섭했던 심정도 솔직하게 드러냈다.
''포니 정(Pony Chung)''으로 불리며 한국경제의 한 페이지를 장식해온 정 명예회장은 "나는 오직 자동차만을 생각하고 자동차를 위해 살아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며 "오늘날 다시 생각해 봐도 자동차는 내 분신과 같은 소중한 존재"라고 술회했다.
그는 자서전에서 우선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정주영 전 현대명예회장과의 관계를 비롯한 가족이야기,사업을 추진하면서 정부와 겪었던 갈등,예기치 못한 병마를 이겨낸 이야기 등을 소개했다.
강원도 통천에서 8남매 중 넷째 아들로 태어난 그는 어릴 때부터 큰 형인 정주영 전 현대명예회장이 자신에게 말할 수 없이 큰 존재였다고 기술했다.
그는 "어머니는 늘 장독대 앞에 정화수를 떠 놓고 신령님께 큰 형님의 축복을 빌었다"며 "부모님의 영향으로 ''큰 형님이 잘돼야 우리 집안이 잘된다''는 의식이 머리속 깊숙이 자리잡았다"고 어린 시절을 회고했다.
''큰 형님 위주''의 사고방식은 무척이나 엄격했던 아버지의 뜻이었다면서 "나를 포함한 나머지 형제들은 큰 형님의 결정이나 의사에 반하는 것은 상상할 수 없었고 큰 형님의 말 한마디는 곧 법이었다"고 밝혔다.
정 명예회장은 고려대 정치학과에 다니던 청년시절을 되돌아보면서 "당시 나의 주도로 모의국회를 준비했었는데 큰 형님이 필요한 모든 자금을 쾌척해 줬다"며 "이 때 어려운 가운데서도 일을 추진하면서 느낀 성취감은 억만금을 줘도 바꿀 수 없는 귀중한 경험"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미국에서 정치학 석사를 마치고 귀국했을 때 교수나 정치가의 꿈을 꾸기도 했지만 "사업을 함께 하자는 큰 형님의 제의를 거부할 수 없었다"고 사업에 뛰어든 배경도 설명했다.
정 명예회장은 결혼한지 1년이 지난 1959년 10월께 ''간경변증''이라는 진단을 받으면서 인생에서 처음으로 큰 시련을 만났다.
체중이 눈에 띄게 줄고 머리도 거의 다 빠져 한눈에 병세가 위중하다는 걸 알아 차릴 정도였다.
그는 "간이 점점 굳으면서 오그라드는 병으로 거의 간암으로 발전한다는 말에 사형 선고를 받은 느낌이었다"고 당시를 되돌아봤다.
절망에 빠져 있던 그에게 새 삶의 용기를 심어준 것은 그의 아내와 큰 형님이었다.
그는 "아내가 없었다면 자신은 병마와의 싸움을 결코 이길 수 없었을 것"이라며 "또 동생 걱정으로 새벽에 산삼을 들고 큰 형님이 나타났을 땐 말을 이을 수 없었다"고 회고했다.
자서전엔 1986년 말 정주영 당시 현대그룹회장이 자신에게 그룹회장을 맡으라고 한 이유를 그때로서는 전혀 알 수 없었다는 대목도 들어있다.
그는 "1987년을 며칠 앞두고 큰 형님이 갑자기 불러 그룹회장을 맡으라고 했다"면서 "환갑이 되는 1년 6개월 이후에 시키는대로 하겠다"며 처음엔 제의를 사양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1987년 초 또 다시 불러 "애들을 회장시켜야겠는데 그러자면 네가 자동차 회장과 그룹회장을 맡아야 모양이 서지 않겠냐"고 물어 같은해 2월 그룹회장에 취임하게 됐다고 전했다.
그는 "큰 형님이 그룹 회장직을 내놓은 데는 또 다른 중요한 목적이 있었는데 그것이 정계 진출이었다는 것을 그룹회장에 취임한지 2~3년 지나고서야 감을 잡기 시작했다"고 술회했다.
특히 1990년에 접어 들면서 "큰 형님이 정계진출을 구상중이라는 소문이 돌자 경제계 내부에서 조차 ''현대와의 거리를 유지하라''는 ''암호메시지''가 나돌았다"고 당시 분위기를 설명했다.
정 명예회장은 5공화국 시절 평화의 댐 공개입찰과 6공화국 당시 올림픽대교 공사에서 현대가 불이익을 받은 것은 모두 ''큰 형님''의 정계진출과 관련된 것이었다고 보고 있다.
그는 "그룹회장에 취임한 후 정부는 현대에 무지막지한 세무사찰을 벌여 1천3백억원을 추징해 갔다"며 "현대가 맡았던 청와대 신축공사의 공사비도 당초 예산의 두배인 4백50억원이 들었지만 청와대가 압력을 넣어 공사비를 포기토록 종용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소송을 제기했지만 결국 김영삼 정부 때 소송을 취하했다"면서 "농담반 진담반으로 청와대의 반은 현대 것이라는 말을 하곤 한다"고 덧붙였다.
1999년 3월 32년간 함께했던 현대차를 떠날 때 정주영 전 현대명예회장과 나눴던 대화도 비교적 소상히 기술돼있다.
당시 정주영 전 현대명예회장이 정세영 명예회장의 아들인 정몽규 부회장을 계속 자동차에 근무토록 하겠다는 뜻을 보였지만 다음에 또 곤혹스러운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함께 자동차를 떠나겠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는 32년간 몸담았던 회사를 ''떠나라''는 한마디에 그만두고 나서 "형님이 늘 남들에게 나를 오너(owner)라고 소개했었기에 내가 정말 오너였는지 전문경영인이었는지 몇번이고 자문했다"고 밝혔다.
정 명예회장은 "32년 동안 자동차회사를 경영해 오면서 ''정도경영''을 소신으로 삼아왔다"고 회고하고 "원칙을 지키는 경영을 지향하면 어떤 시련도 이길 수 있다"며 책을 맺었다.
류시훈 기자 bad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