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경창(崔慶昌, 1539∼1583)의 자는 가운, 호는 고죽이다.

전라도 영암에서 태어났으며 당시(唐詩)와 문장에 모두 뛰어나 백광훈 이달과 함께 삼당시인, 이이 송익필등과 더불어 조선중기 8문장으로 불렸다.

퉁소도 잘 불어 을묘왜란 당시 구슬픈 퉁소소리로 왜구들을 향수에 빠뜨려 물리쳤다는 일화도 전한다.

서른살 때인 1568년(선조1년) 문과에 급제했고 북평사(함경도 병마절도사의 보좌관)를 거쳐 1575년 12월 사간원 정언(정6품)에 임명됐으나 이듬해 5월 파직됐다.

선조실록은 이렇게 전한다.

''사헌부가 아뢰기를 최경창은 식견이 있는 문관으로서 몸가짐을 삼가지 않아 북방의 관비를 몹시 사랑한 나머지 불시에 데리고 와서 버젓이 데리고 사니 이는 너무도 기탄없는 것입니다.

파직을 명하소서 하니 아뢴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여기서 지적하는, 최경창이 몹시도 사랑한 관비가 바로 기생 홍랑이다.

함경도 홍원 태생이라고만 알려졌을 뿐 생몰미상인 홍랑이 최경창과 인연을 맺은 것은 고죽이 북평사로 경성에 부임했던 때였다.

1574년 봄 고죽이 상경하게 되자 쌍성(영흥)까지 따라왔다 돌아가던 중 함관령에서 지어 보냈다는 게 ''묏버들 가려 꺾어''로 시작하는 한글시조다.

이후 연락을 끊었으나 최경창이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급거 상경,잠시 함께 살았던 모양인데 그게 문제가 돼 고죽은 면직되고 그녀는 고향으로 돌아갔다.

고죽은 1583년 2월 방어사 종사관에 임명됐으나 한달 뒤인 3월 서울로 오다가 객사했다.

말썽이 날 줄 뻔히 알았을 텐데도 변방 기생을 서울에서 받아들인 걸 보면 그의 사랑이 얼마나 깊은 것이었는지 알 듯하다.

''묏버들…''및 이를 한시로 옮긴 ''번방곡''과 최경창의 답시등 그동안 내용만 전해오던 두사람의 애틋한 연시(戀詩) 원본이 공개돼 화제다.

가람 이병기 선생은 홍랑의 시조에 대해 ''원가(原歌)가 번방곡이란 한시보다도 낫게 되었다. 한 보배다''라고 적었다.

한글시조 원본은 고산 윤선도의 시가 외엔 거의 남지 않은 실정이다.

국문학 연구에 귀중한 사료가 되리라 하거니와 조선조 여성문학이 재평가되는 계기도 됐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