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마고속도로를 달리다가 현풍휴게소의 수백년이 넘어 보이는 느티나무 밑에서 유유히 흐르는 낙동강을 바라보며 지난 공직생활을 회상하다 다산 정약용 선생을 생각했다.
18년 공직생활과 18년 유배생활, 그리고 18년 귀향생활로 인생을 마감한 파란만장한 선생의 생애가 요즘 자주 생각나 얼마 전에는 팔당호반에 있는 선생의 고택과 묘소에 가 보고 또 나라를 걱정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지은 그의 ''목민심서''를 새로 읽어도 보았다.
낙동강을 건너 오곡백과 익어 가는 들길을 지나고 코스모스 아름다운 산골짜기를 달려 고향이 한눈에 보이는 아홉살이재 마루에 올랐다.
가을 하늘 높은데 저 멀리로 봄이면 철쭉꽃 아름다운 황매산이 우뚝하고,가을이면 단풍이 아름다운 가야산이 아득한, 인적하나 보이지 않는 첩첩산중의 고향산하는 언제나 정감이 흐른다.
아홉굽이 재를 돌아 내가 다닌 초등학교를 지날 때 가을운동회 만국기가 펄럭이고 있었다.
아버지 산소에 성묘하고 고향집에 갔더니 사랑채 앞에 노랗게 익은 감과 텃밭의 붉은 고추만 나를 반겼다.
다음 날 아침 군청에서 차를 보내겠다는 것을 사양하고 다산이 ''목민심서''의 첫 머리 ''부임6조''에서 권한대로 검소하고 단정하게 직접 차를 몰아 군청으로 갔다.
''일일 명예군수''의 첫 일과로 ''관속들의 참알''을 받고 간단하게 군 살림과 농촌경제의 어려움을 듣고는 직원 수련회에 갔다.
디지털시대의 변화와 다산의''목민심서''를 엮어 오늘의 공직자가 어떻게 하는 게 ''애국 애민''하는 건가를 강의했다.
주민등록증이 있는데도 주민등록등본을 요구하고,관청간에 확인하면 되는 일도 증명서를 요구해 필요없는 인적·물적자원을 낭비하는 행정행태로는 ''1등만 살고 변화하지 않으면 깨지는 지구촌경쟁시대''에 살아 남기 힘들다고 얘기했다.
두번째 일과로 군립공원 황매산에 오르니 들국화가 만발했다.
내년부터는 이웃 산청군과 함께 ''황매산 철쭉제''를 하게 됐다니,네트워킹해야 이기는 디지털시대에 아주 맞는 일이었다.
합천호수와 높은 산,아름다운 평원에서 ''철쭉제''만 할 것이 아니라 들국화를 심고 억새풀도 심어 가을엔 ''들국화제'' 겨울엔 ''억새풀제''도 열면 좋을 것 같다고 권고했다.
오후에는 1985년에 발굴된 옥전고분을 찾아갔다.
조선시대 왕릉만한 크기의 여러 고분에서 금동제 왕관,철제 투구와 갑옷,칼과 말안장, 그리고 금귀고리와 금팔찌 등 찬란한 대가야의 유물들이 1천8백여점이나 발굴됐다.
하지만 우리 기록으론 유래를 밝힐 수 없고 중국과 일본의 기록에 나오는 다라국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저 아래 낙동강 지류인 황강이 흘러가니 가야국의 지배계급이었던 인도·아리안계가 배 타고 이곳에 와 대가야왕국을 건설했을 것이란 추론도 있고 우리말 ''한(하나),두(둘),세(셋)''와 ''엄마,아빠''가 아리안어인 영어의''one,two,three''와 ''mama,papa''와 어원이 같다는 주장도 있지만 고증이 되지 않고 있다.
신라와 오랫동안 대립하며 낙동강 서남지방에서 문화를 꽃피운 가야왕국의 역사는 왜 실종됐을까 하는 의문 속에 해가 기울어 발길을 돌렸다.
''대야문화제''의 전야제로 열린 ''문학의 밤''에 문학동인들이 주는 시인등단 축하의 꽃다발을 받고 "산다는 건 긴 세월에 흘러가는 그리움"이라고 등단시조 ''그리움''을 낭송했다.
가을 바람 소슬한 저녁,코스모스길 따라 연어가 돼 남정강 모천으로 찾아오니 이렇게 반겨줘 감사하다는 인사를 했다.
고향사람들과 시루떡을 먹으면서,따로 열리는 6가야의 축제를 연합해 ''6가야문화제''를 개최하고 옥전고분의 대가야 유물들과 여러 곳에서 출토된 가야 유물들을 함께 모아 ''대가야박물관''을 세우도록 말했다.
또 합천호반에 골프코스도 만들어 가야산 해인사의 ''팔만대장경''과 황매산의 ''철쭉제''''들국화제''와 ''억새풀제''를 함께 엮은 관광상품을 개발하면,국내뿐 아니라 가야국에 뿌리를 둔 일본관광객도 유치할 수 있을 것이라고 권고하는 것으로 다산의 ''애민사상''을 되새긴 목민관의 일과를 마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