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영 < 소설가 >

경구로써 어떤 일의 급소를 찔러 사람을 감동 시킨다는 것이 "촌철살인"이란 말의 우회적 해석이다.

안백룡 화백의 "소오갈 선생"은 바로 그것을 위해 태어난 시사만화의 주인공이다.

그런데 신문의 시사만화를 일컬음에 곧잘 인용되곤 하는 촌철살인이란 숙어의 직역은,한치의 짤막한 칼로 살인을 한다는 뜻이다.

그런 경우,우리는 이 숙어에서 즉각적으로 얻어내는 이미지가 있다.

그것은 무척 예리하고 섬짓하고 냉혹한 쇠붙이 같은 것을 연상시킨다.

그런데 안백룡 화백의 소오갈이 우리들에게 각인시킨 인상은 예리하다거나 냉혹한 인간상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소오갈의 생김새나 행동 어디에서도 그런 비정한 모습을 찾아내기 어렵다.

오히려 그 반대의 자리에 소오갈은 숨어 있는 듯 존재한다.

안경까지 끼고 있으면서도 언제나 세상물정에 어두우며,그래서 때로는 우둔하고 때로는 투박해 항상 피해자의 위치에 있지만,가슴속에 세워둔 기둥 같은 것은 움직임이 없어 누가 뭐라 해도 줏대 있게 살아가는 것이 소오갈의 인생관이고 가치관이란 것을 단번에 눈치챌 수 있다.

예리하고 냉혹한 인간을 내세워 촌철살인의 무기로 삼는 일차적인 방법을 쓰지 않고 오히려 그 반대로 우둔하고 투박하며 질박하여 야박한 세상 인심에 요령있게 대처하거나 달통하지 못해 곧잘 피해를 입고,하루만 지나도 돌변해 있는 세상이 두려워 적당히 거리를 두고 살 수 밖에 없는 주인공.

그를 내세워 야박하고 비정한 세상을 역공하는 무기로 삼았다는 것에 이 시사만화의 성공적인 놀라움이 존재한다.

그의 만화는 언제나 그러하듯 정면에서 사회의 환부나 치졸함을 공격하지 않는다.

늘 가만히 다가와서 뒤통수를 치기 때문에 우리로 하여금 한 번 웃고 나서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것,그 속에 이 만화의 감동과 진수가 또한 숨어 있다.

이 만화를 한국경제신문에 연재하기 시작하면서 지금까지 안백룡 화백의 출근 시간은 지난밤의 어둠이 채가시지 않은 오전 6시 30분이다.

하루 전의 신문제작이 남긴 열기와 북적거림의 잔해가 가라앉은 허탈한 편집국으로 그는 혼자 들어선다.

그 날의 조간을 모두 뒤져보기 위해서다.

신문을 모두 읽고 나면 그의 고민과 뒤채임은 시작된다.

그리고 어느 듯 우리들의 소오갈은 태어난다.

소오갈은 그렇기 때문에 매일 태어나고 매일 죽는 우리들 서민 가정의 남자다.

매일 죽지만 매일 태어나기 때문에 부박하지만 신선하고 끈질긴 생명력을 유지한다.

길가에 피어 사람들의 발길에 짓밟히고 채이는 질경이 같은 생명력을 지닌 것이다.

4단 만화 속에서 살아가는 소오갈의 줏대와 생명력을 불어넣기 위해 매일 아침 6시 30분 출근을 결코 어긴 적이 없는 안백룡 화백의 고초를 기억하면서 나 또한 매일 그의 만화를 빠짐없이 읽는다.

그 만화 속에는 그 날의 기사에서 다루지 않았거나 차마 다룰 수 없었던 뉴스의 진수가 숨어 있기 십상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