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 영국은 국내 경제사정의 악화로 파운드화의 환율이 매우 불안한 모습을 보였다.

이때 존 메이저 총리는 유럽통화체제(EMS)에 가입해 환율을 안정시키려 했으나 조지 소로스가 운영하는 퀀텀펀드의 공격을 받게 됐다.

당시 노먼 레이먼트 재무장관은 파운드화를 방어하기 위해 수백억 달러를 썼지만 결국 헤지펀드의 공격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영국은 유럽통화체제에서 탈퇴했고 파운드화는 다시 크게 절하됐다.

한 개인이 이끄는 헤지펀드에 참패한 레이먼트 장관의 체면은 말해 무엇하랴.

그런데 그는 남이 안보는 목욕탕 안에서는 콧노래를 불렀다고 실토함으로써 세간의 이야깃거리가 됐다.

그는 파운드화의 절하로 영국 경제가 불안해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경기가 살아나는 등 급속히 안정을 보였기 때문에 즐거워한 것이다.

국회의원 선거가 끝나자 주가가 폭락했다.

어느 정도 예견된 일이었으나 공교롭게도 선거가 있던 주말 미국 주가가 곤두박질치면서 우리 증시도 엄청난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됐다.

주가가 급격히 떨어지자 여기저기서 탄식과 노여움의 소리가 들리고 있다.

외환위기 이후 증권시장은 꿈과 기회의 터전이었는데 믿었던 기둥이 뿌리부터 흔들리니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 한번 더 생각해보면 최근 주가 폭락은 우리 경제의 기저를 흔들 만큼 불안했던 사건은 아니었다.

주식에 승부를 건 사람들이 아우성을 치고 있는 사이 은행 문턱을 넘나들며 알뜰살뜰 살림을 꾸려 나간 사람들은 안도의 숨을 몰아쉬었을 것이다.

게다가 식견이 있는 사람들은 냉정을 되찾고 레이먼트 장관처럼 흥얼거리지 않았을까.

그동안 코스닥 시장을 중심으로 우리 증시가 과열됐다는 여러 가지 지표들이 발표됐지만 증시의 뜨거운 열기에 묻혀 버리고 말았다.

정보통신기술과 벤처에 대해서 잘 알지도 못하면서 "묻지마 투자"를 감행하고 작전 세력이 등장해 투자위험이 증대돼왔다.

차제에 최근의 주가 폭락은 우리 경제에 일대 경종을 울려 줬다.

우리 증시가 그동안 불안한 모습을 보여 왔음을 인정한다면 이를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다.

지난 1년여의 증시 활황을 그리워하는 나머지 이를 재현하려 해서는 안된다.

현재 2백조원의 유동자금이 증시를 떠나 투자처를 찾고 있다고 한다.

수많은 투자자들이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기 위해 증시 주변을 헤매고 있을지 모르나 또다시 묻지마 투자를 감행한다면 더 큰 피해가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작년 초 이후 증시가 대활황을 보인 것은 대내외 여건이 특별했기 때문이다.

98년 여름 세계 경제가 세계적 금융위기와 공황의 위험을 벗어나면서 아시아 외환위기국들도 미국 경제의 호황과 엔화 강세에 힘입어 강한 회복세를 보였다.

우리 경제는 98년중 성장률이 마이너스 6%를 기록했으나 지난해에는 10% 이상 늘어난 실적을 거두었다.

빠른 경기 회복과 증시 활황은 그러나 여러 가지 부작용을 유발했다.

우선 경기가 회복되자 위기 의식이 희박해지면서 구조조정의 의지도 약해지고 임금상승 압력이 높아지면서 물가 불안을 우려하게 됐다.

특히 아시아 및 선진국 경기 회복으로 유류 소비가 늘어나면서 유가 상승에 따른 물가 불안이 점증하게 됐다.

다른 한편으로는 기업들의 설비투자가 확대되면서 수입이 늘어나고 경상수지 흑자가 급속히 줄어들게 됐다.

이런 여건에서는 주가 하락이 경제를 안정시키는 작용을 한다.

주식 시장이 조정국면에 들어가면서 소비와 투자가 안정을 되찾고 경상수지가 개선되면서 금리와 환율이 안정되는 새로운 선순환이 시작된다.

지금까지 정부는 구조조정으로 기업 경쟁력과 경상수지가 개선되고 주가가 상승함으로써 금리와 환율이 안정되는 선순환 구조를 상정했다.

그러나 선순환의 단초가 되는 구조조정은 IMF관리체제 3년차를 맞아 공적자금 추가 조성,국부 해외유출,이해집단간 갈등 등의 문제로 주춤해지는 가운데 주식시장의 활황에 지나치게 의존해 왔다.

외환위기 이후 우리 기업들은 필요한 자금을 대부분 주식 시장에서 조달했다.

기업부문의 주식시장을 통한 자금조달은 외환 위기 이전에는 10%에도 미치지 못했으나 지난해에는 70%를 상회했다.

이렇게 기업의 증시의존도가 급격히 높아진 것은 정부가 재벌기업의 부채비율을 2백% 이내로 억제하는 한편 주식시장 확대에 주력했기 때문이다.

기업의 증시의존도가 높아지면 부채비율이 높은 경우와 마찬가지로 도덕적 해이를 유발한다.

주가 폭락을 계기로 정부는 금융시장에 형성된 새로운 도덕적 해이를 제거하는 데 힘을 쏟아야 할 것이다.

wapark@ wow. hongik. ac. 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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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 약력 =

<>서울대 공대 졸업
<>미 MIT대 경제학 박사
<>KDI 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