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구난방이라는 말에는 두 가지 뜻이 있는 것 같다.

하나는 글자 그대로 뭇 사람이 입을 모아 같은 소리를 내면 그것을 막아내기가 어렵다는 뜻으로 수렴된 여론의 힘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가르쳐 준다.

"여러 사람의 말은 쇠도 녹일 수 있다"는 중구삭금이라는 단어와 같은 의미를 갖는다.

또 한가지는 이와는 사뭇 다른 뜻으로,뭇 사람이 같은 소리가 아니라 각양각색으로 떠들어대는 경우를 가리킬 때 이 말이 사용된다는 것이다.

요즈음에는 두 번째 의미가 보편화돼 가는 듯 하다.

새삼 이 단어의 두 가지 의미를 구분해 보고 싶어진 것은 그것이 여론 또는 중론에 의해 제기된 정책 이슈를 해결하는데 있어 아이디어를 제공할 수도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정부가 생각하거나 하고자 하는 바와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의 숫자가 점점 늘어나 중구난방의 첫 번째 의미와 같은 어려움이 닥쳐올 때에 정부는 이들과 친정부적인 의견을 가진 사람들을 모아 한꺼번에 떠들거나 토론하게 함으로써,즉 두 번째 의미의 중구난방을 유도함으로써 해결방안을 찾아 볼 수가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문제가 희석돼 정부의 정책추진 환경이 개선되거나 아니면 문제의 심각성이 분명하게 부각됨으로써 정부가 다시 판단해 생각을 바꾸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지난주 백악관에서 열렸던 "신경제 회의"도 이러한 전략의 일환이라고 볼 수도 있다.

경제학자나 전문가들 사이에 신경제와 주식시장의 과열에 관해 걱정하는 목소리들이 높아지면서 나스닥시장이 급격하게 위축되는 시점에서 클린턴 행정부는 이들과 함께 신경제를 옹호하는 전문가들을 모아 토론의 장을 마련했던 것이다.

클린턴 대통령을 위시해 그린스펀 연준리 의장,마이크로소프트사의 빌 게이츠 회장 등 회의에 참석했던 거물급 인사들은 각인각색의 견해를 내어놓아 백가쟁명,또는 두 번째 의미의 중구난방의 모습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이견이 많았던 회의였지만 신경제문제의 본질을 꿰뚫어볼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됐으며 대부분의 참석자들이 신경제의 미래에 대해 "조심스런 낙관론"을 갖고 있다는 점도 확인이 됐다.

우리로서는 이번 회의가 기획되고 진행돼 가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몇 가지 배울 점을 찾아볼 수 있었다.

먼저 의견이 다른 사람들을 고루 참석시킴으로써 회의의 균형이 유지되고 회의결과에 대한 국민들의 신뢰도 높아지게 됐다는 점이다.

우리가 외환위기 극복에 관한 회의,특히 국제회의를 열면서 주로 친정부적인 의견을 가진 인사들을 초대했던 방식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그런 회의에서 위기극복의 성공사례만 찬양할 것이 아니라 재정적자와 국부유출 문제도 함께 충분히 논의됐더라면 이들 문제에 대한 국민들의 이해가 높아졌을 것이고 따라서 선거를 앞두고 정부와 여당이 당황해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다음으로 백악관회의가 극히 심도 있게,그리고 민주적으로 진행됐다는 점이다.

회의는 하루종일 열띤 논쟁의 연속이었으며 현직 장관이 대통령의 생각과 다른 소신을 얘기하기도 했다.

서머스 재무장관은 신경제의 특성을 인정하면서도 구경제의 미덕이었던 "신중함"과 "투철한 리얼리즘"을 잃어서는 안된다는 입장을 밝혔던 것이다.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면서 우리나라의 정책회의도 과거와는 바뀐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는 하나 장관이 대통령과 다른 의견을 정면에서 제시하거나 설전을 벌일 정도까지 민주화됐다고 보기는 어렵다 하겠다.

경제장관이 회의석상에서 꾸지람을 듣는다거나 위축돼 소신을 제대로 밝히지 못하게 되면 결국 외환위기와 같은 사태가 일어날 수도 있다는 교훈을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번의 백악관 회의에서 확인된 바로는 실물경제에서는 아직 과열 기미가 없다고 하더라도 주식시장은 과열상태에 있다고 보는 전문가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경제전문가들의 의견이 이런 방향으로 일치를 보여나가는 경우에 정부는 더 이상 여론을 무마하려고 할 것이 아니라 중구난방의 첫 번째 뜻을 새기면서 중론을 받아들이는 것이 바람직한 대응이라고 하겠다.

그렇지 않고 오만한 자세로 전문가들의 중론이나 여론을 무시했다가 경제에 큰 타격을 입힌 사례가 과거에도 여러번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미국이나 우리나 조만간 나타나게 될 나스닥시장의 대폭조정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대응방안을 마련해야 한다는 얘기가 된다.

우리나라 쪽으로 좀 더 눈을 돌려본다면 금융시장 노동시장 재정적자 등에 관해 우려하는 목소리들이 높아지고 있다.

선거가 끝나고 나면 정부는 이 문제들에 관해 중립적인 입장에서 토론의 장을 마련해 보고 지금까지의 정책방향을 재점검해 보는 기회를 가져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