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중은행들이 구소련에 차관을 제공했다가 못받은 원리금 가운데 제일은행 몫만 정부가 떠안은 것으로 밝혀져 문제가 되고 있다고 한다.

지난 91년 국내 10개은행은 소련에 10억달러의 차관을 제공해 이중 5억달러의 이자분만 현물로 상환받고 원금 10억달러와 5억달러에 대한 이자는 한푼도 돌려받지 못한 상태에서 제일은행의 미수채권 1억1천만달러만 예금보험공사가 인수하자 문제가 발생하게 됐다.

나머지 은행들이 왜 제일은행분만 갚아주냐며 형평성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이에 대해 정부에서는 뉴브리지 캐피털과의 제일은행 인수 계약에 따라 제일은행분 인수는 불가피했다는 입장이다.

나머지 은행들의 미수 채권에 대해서는 상환 기간과 이자율을 재조정해 최대한 상환받도록 하되 여의치 않을 경우 대지급 문제는 그 때 가서 보자는 입장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정부의 뉴브리지 캐피털과의 협상 내용을 문제 삼고 싶은 생각은 없으나 정부입장에는 두가지 점에서 문제가 있다고 본다.

먼저 지급보증 의무를 어긴 정부가 이를 무시하는 것은 관치금융의 전형이라는 점이다.

당시 은행들은 수교협상의 대가로 차관을 제공하기로 한 정부의 약속을 이행하기 위해 마지못해 차관단에 참여했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 때 은행들은 소련의 상환 능력을 의심해 차관금액 90%에 대해 정부의 지급보증을 받아두었고 러시아가 상환의무를 이행하지 못하는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은행들이 정부의 대지급을 요구하는 것은 은행의 권리이자 주주에 대한 의무이기도 하다.

이처럼 정당한 금융기관의 요구를 정부가 일방적으로 무시하는 것이 관치금융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두번째로 지적하고 싶은 것은 국내 금융기관에 대한 역차별이 관례화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이다.

종금사 부실채권 처리문제에 이어 이번에도 외국계에 인수된 제일은행만 부담을 덜어줘 국내 금융기관을 역차별하게 됐다.

외국 금융기관이 차별대우를 받아서도 안되겠지만 만만한 국내금융기관만 역차별 당하는 사례가 반복돼서는 곤란하다.

금융거래에 있어 차주가 상환의무를 지키지 않을 경우 지급보증을 선 사람이 대신 물어주고,국내외 금융기관을 차별해서는 안되는 것이 개방화시대의 금융원리다.

정부 스스로가 금융원리를 무시하면서 관치금융 청산,금융개혁 운운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만에 하나 공적자금 투입과 금융구조개혁 와중에서 입지가 약화된 국내 금융기관의 약점을 악용해 이들의 정당한 요구를 무시한다면 관치금융 청산은 공허한 구호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