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채무 규모를 둘러싼 민주당과 한나라당의 공방이 제법 치열하다.

성명전으로 출발했던 이 싸움은 텔레비전 토론을 거쳐 신문광고전으로까지 확산되는 양상이다.

이대로 나가면 선거전 막판까지도 논란이 계속될 것이다.

재정경제부와 기획예산처가 도하 각 신문에 "우리의 국가채무, 4백조원이 아니라 1백8조원입니다"라는 신문광고를 낸데 이어 민주당도 한나라당이 국가채무를 부풀림으로써 국가신용도를 떨어뜨리고 나라망신을 시킨다며 강력한 비난광고를 냈다.

정부여당의 논리는 단순하다.

중앙정부와 지방정부가 직접적으로 원리금 상환 의무를 지는 1백8조원만이 국가채무라는 것이다.

반면 한나라당은 한국은행 등 통화당국의 채무, 공기업의 채무, 정부가 보증한 채무, 그 규모를 미리 확정할 수 없는 국민연금의 잠재적 적자를 모두 합쳐 국가부채가 무려 4백조원이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는다.

도대체 어느 쪽이 진실일까?

한 마디로 대답하자면 둘 모두 진실이 아니다.

만약 한국은행과 공기업, 정부 보증으로 빚을 쓴 기업, 국민연금 관리공단 등이 모두 빚을 갚을 수 없는 상황이라면 한나라당의 주장은 참이 된다.

그런데 이건 사실상 나라 전체가 망하는 상황이다.

따라서 4백조원은 나라를 위험에 빠뜨리는 요인이라기보다는 나라가 아주 망한다고 가정할 경우 결과적으로 나타날 국가부채의 규모라 할 수 있다.

반대로 한은과 공기업, 정부 보증으로 빚을 쓴 기업과 국민연금이 다들 아무 문제없이 제 앞가림을 완벽하게 한다면 당연히 정부여당의 말이 참이 된다.

하지만 이것 역시 현실이라기보다는 실현 가능성이 희박한 희망사항에 불과하다.

진실은 그 둘 사이 어딘가에 있다.

문제는 일이 잘못될 확률이다.

4백조원과 1백8조원의 격 차는 약 3백조원.

정부가 새로 빚을 얻어서라도 대신 메워야 할 문제가 발생할 확률을 0%로 보면 민주당 말이 옳고 1백%로 보면 한나라당 말이 맞다.

만약 10%라면 국가채무는 정부여당의 주장보다 30조원을, 20%라면 60조원을 늘려 잡아야 한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여야의 견해 대립과 상호비방은 과장된 것임에 명백하다.

하기야 정치라는 것이 원래 "과장의 미학"을 적절히 활용하는 "비방의 예술" 아니겠는가.

이건 추상적 학술논쟁이 아니라 정당간의 정책논쟁이다.

어디까지를 국가부채에 포함시키든간에 문제가 있다면 마땅히 해결책을 내놓아야 할 일이다.

그런데 문제를 제기한 한나라당 선대위 정책위원장은 텔레비전 토론에 나와서 "무슨 대안이 있다는게 아니라 문제가 그렇게 심각하다는 것을 지적하려고 하는 것"이라며 발을 빼고 말았다.

거 참 허무한 일이다.

과감한 "과장의 미학"으로 유권자의 시선을 끌어모았으면 그 무슨 대책을 제시해야 표를 받을 것 아닌가.

그런데 대안이 없다니?

그야말로 미늘 없는 바늘로 낚시를 하는 셈이요, 그물도 없이 고기잡이 나선 격이다.

지금 우리가 목격하는 바 여야의 정책대결은 그 열기는 뜨거우나 내용은 아직 부실하다.

더러는 지난 대선 공약을 재탕한 것도 있고 실천할 의사가 전혀 없으면서도 순전히 유권자의 비위를 맞추려고 급조한 헛공약도 적지 않다.

보수를 자처하는 정당이 빈부격차의 시정을 약속하는 "사상적 탈선"도 서슴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래도 이게 어딘가.

민국당의 "영도다리 퐁당론"과 JP의 "찬탁반탁론"을 계기로 벌거벗은 지역주의와 곰팡내 나는 냉전논리가 금방이라도 선거판을 말아먹을 듯 위세를 떨쳤던 열흘 전 상황에 비하면 엄청 많이 발전한 셈이다.

이젠 적어도 나라살림과 민생문제를 가지고 싸우니 말이다.

그러니 아무리 엉성하다고 해도 이러한 정책논쟁에는 일단 뜨거운 박수를 보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시사평론가/성공회대 겸임교수 denkmal@hite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