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익은 과일처럼 향기 좋고 맛도 깊은 이야기.

신인 작가 오승희(39)씨의 첫 동화집 "할머니를 따라간 메주"(창작과비평사,
6천원)는 읽을수록 정이 간다.

작가는 도시 아이들의 크고 작은 고민과 내밀한 감수성을 7편의 단편동화에
담아냈다.

작품마다 뚜렷한 주제의식과 현실감 있는 묘사, 사물에 대한 따뜻한 시선이
돋보인다.

소외된 아이들의 심리상태를 섬세한 필치로 그려낸 것도 미덕이다.

초등학교 4~6학년 어린이의 세계를 꾸밈없이 보여줌으로써 이들에게 폭넓은
공감을 불러일으킬 것으로 보인다.

그 중에서도 책제목으로 쓰인 "할머니를 따라간 메주"는 감동과 재미를
한꺼번에 주는 수작이다.

아파트에서 메주를 쑤고 장을 담그며 전통적인 삶의 방식을 고집하는
할머니와 "슈퍼에서 사먹으면 되는데 냄새나게 왜 그러냐"고 못마땅해하는
어머니, 그 사이의 갈등을 슬기롭게 풀어가려는 손녀의 따뜻한 마음이 잘
어우러져 있다.

시골집 장독대에서 항아리에 메주를 띄우며 할머니와 손녀가 나누는 대화,
저녁밥상에 오른 된장찌개를 땀이 맺히도록 맛있게 먹는 가족의 모습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살랑살랑 된장 단지 위를 스쳐온 맛있는 바람"처럼 싱그러우면서도 콧날이
시큰해지는 작품이다.

"내 친구 용우"는 우등생 형의 그늘에 가려져 주눅이 든 용우에게 애정
어린 관심을 보이는 친구의 이야기다.

집안에서나 학교에서나 늘 기가 죽어 지내는 그를 앞자리에 앉은 친구 성진
이 포근하게 감싸며 위로해준다.

성진이 다른 친구들의 비아냥에도 불구하고 용우와 붙어다니다 덩치 큰
아이들과의 싸움을 계기로 용우에게 진정한 용기를 되찾게 해주는 과정이
훈훈하게 다가온다.

반장 선거를 소재로 한 "우리의 반장" 역시 명랑하고 꿋꿋한 심성을
일깨워주는 동화다.

"하얀 깃발 우리 집"은 무당집 딸 진희가 자신의 내력을 숨기려고 전전긍긍
하다 당당한 소녀가장 미선이를 만나 거듭나는 내용이다.

직장 잃은 아버지를 통해 사랑의 가치를 깨닫는 "강가의 아버지", 어린
동생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헌 인형과 보육원 아이의 내면에 비춘 "은희야
은희야"도 오래 음미할 만하다.

< 고두현 기자 kdh@ked.co.kr >


( 한 국 경 제 신 문 2000년 2월 12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