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그디시 바그와티 < 미 컬럼비아대 교수 >

1999년 미국 시애틀 세계무역기구(WTO) 회담을 쑥밭으로 만든 비정부기구
(NGO)의 시위를 자유무역주의자들에 대한 승리라고 평가할 수 있을까.

그리고 NGO의 행동은 이익추구 세력의 몰락과 세계시민시대의 개막을
의미하는 것일까.

많은 선진국 시민들은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한다면 큰 착각이다.

세계의 빈곤국가들은 시애틀 WTO회담에서 앞으로 WTO가 선진국뿐 아니라
선진국 소속 NGO나 노동조합 로비단체들에 의해 좌우될 수 있다는 교훈을
얻었다.

그리고 이 교훈은 후진국에 험로를 예고하고 있다.

선진국들이 무역자유화 회의에 상정할 의제에 합의할 무렵 빈곤국 대표들은
WTO 근로기준에 "어린이 노동문제"를 포함시키려는 미국측 안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사실 빈곤국들은 시애틀에 도착하기에 앞서 미국측 안에 반대의사를 분명히
했었다.

그러나 이들은 막상 시애틀에 도착해서는 미국 등 부자나라들의 안에 반대할
수가 없었다.

아니 반대의사를 전달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다.

왜 그랬을까.

WTO회담에 참석한 후진국 대표들은 두가지에 놀랐었다.

시애틀의 전경 때문이기도 하지만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NGO의 시위에
당혹스러움을 느껴야했다.

뉴라운드를 관철시키려는 선진국들의 이론에 대항할 치밀한 이론으로
중무장한 후진국 대표들의 목소리가 NGO 시위대의 고성에 묻혀버렸기
때문이다.

AP통신은 당시 "어린이노동 금지-WTO는 어린이들이 죽도록 일하기를
바라는가"라는 글귀가 쓰여진 플래카드를 들고 있는 한 10대 소년의 사진을
세계 언론사에 타전했었다.

이 소년은 학교를 빼먹고 시위에 참가한 것으로 밝혀졌다.

그러나 이 피켓의 글귀는 잘못됐다.

오히려 "여러분은 어린이들이 굶어죽기를 바라는가"라는 문구가 더 시의적절
하다고 생각된다.

후진국의 10대 소년이었다면 이런 플래카드를 들고 있었을 것이다.

빈곤국이 당면해 있는 가장 풀기 어려운 숙제는 어린이 기아 문제이기
때문이다.

영국의 클레어 숏 국제개발부 장관이 지적한대로 어린이 노동문제는
국제무역과는 관련이 없는 사안이다.

따라서 어린이 노동문제가 WTO의 무역분야 회의에 채택되느냐, 그렇지
않느냐는 사안의 본질과는 아무 관계도 없다.

일각에서 NGO의 행동이 미국의 노동집약 산업을 후진국과의 경쟁에서
보호하기 위한 "고도의 준비된 시위"라는 의혹이 일고 있다.

만약 이같은 의혹이 사실로 들어날 경우 이는 도덕성을 위장한 또 하나의
보호무역주의나 다름없다.

개발도상국 관계자들은 선진국들이 WTO회담에서 각종 현안과 관계된
의제들을 왜곡시켜 왔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후진국들은 이번에는 뜻하지 않은 부자나라의 NGO 시위에 눌려
자신들의 의사를 꺼내지도 못했다.

언론매체도 후진국의 관심보다는 선진국들의 이해관계와 NGO 시위, 그들의
주장에만 귀를 기울였다.

앞서 지난 93년의 우루과이 라운드에서도 선진국들은 후진국들을 감쪽같이
속인 사례가 있었다.

지식소유권 문제는 분명 무역관련 의제가 될 수 없음에도 불구, 선진국들은
이를 의제로 상정했으며 후진국들로 하여금 이를 받아들이도록 강요했다.

이는 분명 선진국들의 후진국에 대한 횡포다.

노동문제로 주제를 바꿔 보자.

노동문제에서도 후진국은 선진국 노동조합연맹의 기세에 눌려 전혀
제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게다가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은 노동자의 노동권리를 존중하지 않는 경우
빈곤국에 대해서도 무역제재를 가할 수 있음을 천명했다.

빈곤국 대표들은 당연히 강력 반발하며 회의장을 박차고 나가버렸다.

노동문제 회의를 보이코트한 것이다.

NGO들은 이같은 과정을 무시한 채 자신들의 "단결된 행동"으로 선진국들이
주도하는 뉴라운드를 막아냈다고 착각하고 있다.

또 NGO들은 자신들이 WTO를 견제할 주요 세력으로 부상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과연 NGO의 운동이 선진국 주도의 뉴라운드를 막아낸 것일까.

나는 전혀 그렇게 생각지 않는다.

선진국의 NGO를 비롯 노조연맹 로비단체들은 겉으로는 후진국과 노동자
어린이 등 약자를 위한 목소리를 냈지만 정작 자신들이 누리고 있는 권리를
유지하는 데에 속셈이 있었기 때문이다.

진실이 왜곡돼 있다.

이제 후진국들은 선진국뿐 아니라 선진국 소속 NGO들의 눈치도 봐야하는
딱한 처지에 놓이게 됐다.

그래도 선진국의 NGO들은 WTO가 부자나라들의 손아귀에 들어가는 것을
몸으로 막아냈다고 주장하고 있다.

얼마나 진실이 왜곡돼 있는가.

< 방형국 기자 bigjob@ked.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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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GATT의 경제정책 보좌역(1991~1993년)을 역임한 자그디시
바그와티 미 컬럼비아대학 교수(정치경제학)의 파이낸셜타임스 기고문이다.

( 한 국 경 제 신 문 2000년 1월 7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