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이 끝나고 경제가 부흥을 찾자 사무직뿐만 아니라 블루칼라(노동계)의
골프 인구도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USGA(미국골프협회)가 출범한지 어언 60여년의 세월이 흘러 미국 골프계도
안정을 찾아가지만 골프규칙은 R&A(영국왕립골프협회)와 다른 면을 나타내고
있었다.

1951년 드디어 미국과 영국의 골프규칙 협의위원들이 세인트 앤드루스에
모여 그동안 문제가 됐던 안건들을 하나로 통일하는데 합의했다.

이로 인해 "스타이미"(Stymie :방해구란 뜻으로 그린위에서 자기볼과
홀사이의 퍼팅라인에 상대의 볼이 있어도 그대로 플레이를 해야함)도
사라졌다.

월터 하겐, 진 사라젠, 바비 존스가 미국태생으로 전쟁전의 3인방이라
부른다면 그다음 시대의 3인방은 넬슨, 스니드, 호건이라 할수 있다.

1937년 버지니아 서쪽 두메산골에서 갑자기 나타나 오크랜드 오픈을 포함해
4개 대회에서 우승하고, 그 해 US 오픈 2위를 한 샘 스니드(1912~)란 청년이
있었다.

그는 어릴적 녹이 슨 5번아이언을 주워 창고뒤에서 벽에 원을 그려놓고
맞히기를 하며 혼자 골프를 배웠다.

큰 체격에 우아한 스윙은 그를 골프역사에 위대한 골퍼로 만들기에 적합
했다.

특유한 산골출신의 억양에 도시 사람들은 들어보지도 못한 많은 지방
유머들로 그는 순식간에 많은 친구들을 갖게 되었다.

오크랜드오픈 우승후 그의 기사와 사진이 뉴욕타임스지에 실렸다.

그는 기자들에게 기적과 같은 일이 일어났다면서 "나는 뉴욕에 가본적이
없는데 어떻게 내 사진이 뉴욕타임스에 실렸나?"하며 조크를 해 주위사람들을
웃기곤 했다.

당시 그의 하도 많은 조크와 유머로 인해 신문사주들은 기자들에게 그가
하는 말을 한마디도 빠짐없이 적어 오라는 명령을 내리기도 했다 한다.

미국 PGA투어 최다승(84회)의 기록과 함께 3번의 마스터스, 3번의 US PGA,
브리티시오픈을 석권하였다.

1939년 US 오픈때에는 마지막홀 파4에서 5타만 쳐도 우승할수 있었는데
O.B도 없이 5온 3퍼팅으로 8타수를 기록하는 아픔을 맛봐야 했다.

1947년 US오픈은 루 워샴과의 연장전에서 패하고, 1949년, 1953년
US오픈에서도 준우승을 함으로써 그의 숙원인 US오픈 타이틀을 끝내 그를
외면하고 말았다.

하지만 그는 1940~50년대 미국 PGA를 주름잡는 골퍼였으며, 여러해동안
바든트로피, 상금왕, 라이더컵 등을 이끌어온 당대최고의 골퍼였다.

또 1959년 그가 태어난 고향근처에서 열린 대회에서 마지막날 59타를 치는
경리로운 기록을 세운다.

1979년 그의 나이 67세에 콰드시티오픈(시니어 투어)에서 67-66타란
스코어를내 세상을 놀라게 했다.

지금도 스니드는 90이 가까운 나이에도 경기에 모습을 드러내는 살아있는
골프의 영웅으로 추대된다.

1953년에 PGA명예의 전당에, 1974년에는 세계명예의 전당에 창립멤버로
추대되었다.

< 전 미PGA 티칭프로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12월 29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