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형.

세월이 가는 속도는 나이가 들수록 빨라진다고 언젠가 하셨던 말씀이
생각납니다.

또 한 해를 보내면서 "20대엔 시속 20km 정도였다면 50대엔 50km로 가속이
붙는다"고 하셨던 말씀을 문득 되새기게 되는 까닭을 저도 이제 나이가 든
때문이라고 지레짐작 하시지는 마십시오.

정말 어떻게 갔는지도 모르게 저문 지난 한 해를 되새기면서 제가 느끼는
것은 "세월의 속도감"이 아니라 도무지 뭐가 어떻게 돼가는지 모르겠다는
당혹감이기 때문입니다.

숱한 기업이 무너지거나 구조조정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면서 실업자가
1백만명을 웃도는 가운데 국회에서는 정치인사정 옷로비 파업유도 언론문건
등으로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었던 한 해, 그런데도 주가는 코스닥시장을
중심으로 천정부지로 치솟는 상황에서 저는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습니다.

"미래는 오지않고 과거는 가지않으며 현재는 머무르지 않으니..."라는
조계종 혜암 종정의 신년법어도 난해하지만,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시절이라는
생각밖에 달리 느껴지는 게 없습니다.

두 천년에 걸쳐 살아가는 "선택받은 세대"의 숙명이 이런 것이라면 달리
어쩔 방법이 없겠습니다만,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느낌 때문에
황량해지기만 합니다.

불길한 생각을 떨쳐버리기 어렵습니다.

정치만 해도 그렇습니다.

내년 총선은 그 어느때보다도 여야간에 죽기살기 양상이 두드러질 조짐
입니다.

어느쪽이 이기든 그 후유증이 우리를 짓누르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과열경쟁이 한동안 없었던 돈선거 부정선거 시비를 재연하는 국면까지
치닫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물론 60년대식 부정선거 타락선거야 되풀이되지 않겠지만, 아무리 낙관적
으로 생각해도 지난 한해보다 정쟁이 심화되면 심화됐지 나아질 것 같지는
않습니다.

과연 역사에는 필연의 법칙이 있고 발전하는 것인지, 아니면 되풀이하는
것인지 저는 확신이 가지 않습니다.

주가도 걱정스럽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우선 코스닥시장의 현재 시세가 과연 적정한지도 의문입니다.

싯가총액이 매출액의 수십배에 달하므로 과대평가됐다는 논리는 접어두고
이른바 미래가치라는 걸 인정하더라도 그렇습니다.

인터넷이용자가 국제전화를 걸더라도 요금은 받지않고 사이사이에 나올
컴퓨터 화면의 광고료로 수익을 올린다는 첨단기술주를 생각해봅시다.

이용자가 폭증할 것은 분명하지만 과연 광고료수입도 그만큼 늘어날지는
의문입니다.

기존 매체광고나 옥외광고가 거의 전면적으로 인터넷광고로 대치되는
기대하기 어려운 일이 벌어지지 않는 이상 현재의 엄청난 싯가총액에 걸맞은
배당능력을 확보하기는 아마도 어려울 것입니다.

주가가 오르는게 꼭 좋은 일이 아니라는 건 두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70년대말 건설주 대폭락과 같은 재앙은 한마디로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해도 될 것입니다.

"주가에 낀 거품"이 더욱 걱정스러운 것은 떨어질 때의 충격에 대한 우려
때문만은 결코 아닙니다.

얼마전 어느 대기업그룹에서 대대적인 성과급제도 도입을 발표했습니다만
속내를 들여다보면 답답하기만 합니다.

코스닥시장쪽에서 벼락부자가 속출하면서 벤처나 증권쪽으로 우수한 인력이
엄청나게 빠져나가고 있어 고육지책으로 파격적인 성과급제도를 도입했다는
설명입니다.

물론 스톡옵션등 성과급제도도입 그 자체가 잘못된 제도는 절대로 아닙니다.

그러나 실업자가 넘쳐나는 상황인데도 높은 이직률 때문에 그런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은 우려해야할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직장에 대한 기존의 가치관이 붕괴되고 있는 단면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IMF로 평생직장이라는 관념이 바뀔 수밖에 없게된 것이 현실이지만,
코스닥시장이 직장과 일에 대한 잣대 자체를 바꿔놓고 있다는 점은 간과할
일이 아닙니다.

과연 좋은 현상인지 판단은 아마도 세대에 따라 크게 차이가 있을 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그런 현상은 갈수록 복잡해지고 있는 우리사회의 한 단면입니다.

사용자와 근로자, 대기업과 중소기업 등 기존의 대칭 관계만으로는
사회현상을 제대로 설명하기 어려운 게 오늘의 현실입니다.

정부나 정치권에 대한 비난의 소리가 높은 것은 어쩌면 바로 이같은
사회현상의 필연적 귀결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집단마다 제각기 제목소리만 내는 양상이 두드러지는 것도 그래서이겠지요.

그러나 따지고보면 정치탓만 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돈이 드는 선거나 부패한 정치가 누구 때문인지 우리 모두 생각해볼
일입니다.

K형.

올해 세모는 이래저래 감상적인 기분을 떨쳐버리기 어렵습니다.

뉴 밀레니엄이니 새 천년이니 하는 소리 때문만은 아닙니다.

정말 내년은 우리에게 중요한 한 해가 아니겠습니까.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12월 29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