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한국의 경제발전에는 기업보국 정신으로 충만된 기업가들의 역할이
컸다.

가난에서 벗어나는게 목표였던 그들.

그러나 이미 그들의 목표는 ''세계 초일류''를 지향하고 있다.

한국경제신문과 대한상의가 공동으로 20세기 20명의 대표적인 기업가를
선정했다.

< 가나다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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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석진(동명목재 창업자.1905~84) =세계 최대의 합판회사를 경영하면서
한국 수출의 개척자 역할을 했다.

15세 되던해 가구공장의 견습공으로 출발한 그는 제재소를 차린 것이
6.25이후 복구경기, 60년대 수출경기와 맞아떨어지면서 급성장했다.

60년대말부터 70년대 중반까지 수출의 날이면 어김없이 주인공으로
등장했다.

70년대말 합판경기 퇴조와 함께 중공업 해운 등 무리한 사업확장이 화근이
돼 80년 창업 55년만에 "동명"의 간판을 내렸다.


<> 구인회(LG 창업자.1907~69) =한국 전자산업의 선구자.

경남 진주시내 2층 목조건물에서 구인회상점을 경영하던 그는 47년 동생
구정회씨및 허준구씨와 함께 크림을 생산하는 락희화학공업사를 설립하면서
LG의 토대를 마련했다.

럭키치약 비누 등으로 생활산업에 주력하던 그는 58년 금성사를 설립했다.

라디오를 비롯해 선풍기 자동전화기 냉장고 등이 LG의 손을 거쳐 국내에서
처음으로 생산됐다.

남이 하지 않는 사업을 주도면밀한 준비를 통해 새롭게 개척해 나가는 것이
그의 원칙이었다.


<> 김성곤(쌍용 창업자.1913~75) =정.재계 모두에 큰 족적을 남긴 팔방미인.

보성전문 상과를 나와 대구삼공은행에서 사회의 첫발을 내디딘 그는
비누제조업체인 삼공합자회사를 설립, 기업경영에 뛰어들었다.

해방직후 금성방직을 경영하면서 방직업계 선두주자로 나섰으며 시멘트사업
에 뛰어들어 국가 발전에 큰몫을 해냈다.

58년 자유당 공천으로 제4대 민의원에 당선돼 정계에 진출한 이후 6~8대
국회의원을 역임했다.

협상력이 뛰어나 정계 막후조정의 중심인물이었다.


<> 김연수(삼양사 창업자.1896~1979) =한국 산업 근대화의 선봉 역할을 해낸
기업가.

일본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인촌 김성수가 설립해놓은 경성방직의 임원을
맡아 기업경영에 참여했다.

24년 삼수사를 설립, 부안 고창 등 호남지역의 대규모 농장을 잇따라 여는
등 농업경영에 적극 나섰다.

31년 회사 이름을 삼양사로 바꾼 뒤 은행 광산 제염 제당 섬유 등 다양한
사업에 뛰어들어 성공했다.


<> 김용완(경방 전 회장.1904~96) =우리나라 섬유산업 발전의 주역.

국내 섬유산업 발전을 선도해온 경성방직과는 38년 지배인으로 첫 인연을
맺었다.

경방의 제4대 대표이사 사장으로 경영을 맡은후 주식분산을 가속화했고
종업원지주제를 확립하기도 했다.

또 섬유산업발전을 위해 47년 대한방직협회를 설립했으며 70년 경방회장에
취임했다.

그는 4대, 9~12대 전국경제인연합회장직을 맡아 우리 경제가 혼란했던
시기에 재계를 이끌었던 한국 근대기업사의 주역 가운데 한사람이었다.


<> 김우중(대우 창업자.1936~) =한국 기업의 눈을 해외로 돌리게한 글로벌
기업가.

67년 창업한 대우실업을 모태로 30년만에 대우를 재계 순위 2위(자산 기준)
의 대기업으로 발돋움시켰다.

특히 92년 "세계 경영"의 깃발을 들고 해외 사업 확장에 나서 한국 기업의
새로운 활로를 제시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무모한 확장"이란 비판도 끊이질 않았다.

도전과 모험으로 점철된 그의 경영스타일에 대한 우려는 국제통화기금(IMF)
한파를 만나 99년 그룹 해체라는 결과로 이어지고 말았다.


<> 김종희(한화 창업자.1922~81) =화약으로 국가 건설에 기여한 기업가.

42년 조선화약공판주식회사에 입사한 것이 화약과의 인연이 됐다.

53년에는 아예 조선화약공판을 인수해 한화의 기틀을 마련했다.

60~70년대 정부의 강력한 경제개발계획 추진으로 사세의 본격적인 확장기를
맞는다.

한국베어링 태평물산 제일화재 경인에너지 등을 인수해 사업을 확장시켜
나갔다.

70년대 들어서는 화약사업만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판단, 종합화학으로
방향을 급선회했다.


<> 박두병(두산 전 회장.1910~73) =1백년 기업의 토대를 닦은 인물.

두산 창업자인 박승직씨의 장남으로 37년부터 박승직 상점의 경영을 사실상
도맡았다.

52년 한국 최대의 주류회사인 OB맥주를 설립하고 두산상회의 무역업을 시작,
사세를 크게 확장시켰다.

60년대엔 두산건설 두산음료 두산기계 등을 설립했다.


<> 박인천(금호 창업자.1901~84) =46세 중년에 사업을 시작한 "늦깎이
기업인", 택시 2대로 금호그룹을 일으켰다.

신혼부부의 신혼여행길에 택시를 빌려주는 사업을 하면서 버스업으로
진출했다.

당시로서는 생각조차 하기 어려웠던 광주~서울, 광주~부산간 장거리 노선을
개발해 도약의 발판을 마련했다.

광주고속을 국내 최대규모의 여객운수회사로 키우는데 성공했다.

그는 50대에 삼양타이어를, 60대에 한국합성고무와 금호실업을 세우는 등
누구보다 노력한 기업인이었다.


<> 박흥식(화신 창업자.1903~94) =한때 조선땅 제일의 갑부로 불리던 인물.

16세때 미곡상을 차리면서 사업을 시작한 그는 18세에 선광인쇄소를 설립한
이후 29세때인 31년 화신상회를 인수하기까지 신기에 가까운 경영수완을
발휘했다.

해방후 한때 반민특위에 구속됐으나 화신백화점 화신산업 흥한방적 등을
중심으로 재계 중심의 자리를 지켜나갔다.

그러나 66년 원진레이온의 전신인 흥한화섬을 설립하면서 사세가 기울기
시작했다.

70년대 들어서면서 화신전자 화신소니 등을 설립, 재기를 노렸으나 80년
끝내 부도를 내고 도산했다.


<> 신격호(롯데 회장.1922~) =일본에서 기업을 일궈 모국의 산업 발전에
기여한 대표적인 기업인.

41년 일본으로 건너가 고학으로 학교를 졸업한 그는 44년 한 일본 투자자의
출자로 커팅오일을 제조하는 공장을 설립, 기업 경영에 나섰다.

제과 부동산 등으로 성장한 그는 67년 한국에 롯데제과를 설립, 한국에
진출했다.

그가 그동안 모국에 투자한 돈은 모두 50억달러.

그리고 이돈은 단 한푼의 과실송금없이 재투자되고 있다.

한때 철강등의 사업에도 진출하려 했으나 정부의 반대로 실패했고 유통
식음료 관광사업에 주력, 해당 분야의 최고 경쟁력을 갖췄다.


<> 유일한(유한양행 창업자.1895~1971) =기업 이윤의 사회 환원및 소유와
경영의 분리를 실천해 한국 기업사에 새로운 이정표를 마련한 인물.

미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26년 서울 종로 2가에 유한양행을 설립했다.

36년에는 회사를 주식회사로 전환하면서 주식의 일부를 임직원들에게 분배,
우리나라 최초로 종업원지주제를 도입했다.

69년에는 부사장이었던 아들을 해임하고 전문경영인 조순권 사장에게
정식으로 경영권을 물려줬다.

71년 타계하면서 유언을 통해 자신의 전재산을 공익재단인 유한재단에 헌납,
사회를 놀라게 했다.


<> 이병철(삼성 창업자.1910~87) ="부의 대명사" "경영의 귀재" "재계의
제일주의자".

그를 표현하는 숱한 수식어만큼 한국 재계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기업가.

마산에 정미소를 세워 사업에 손을 댄 그는 38년 삼성상회, 53년 제일제당,
54년 제일모직을 설립하면서 국내 최대기업의 토대를 닦았다.

61년에는 전국경제인연합회의 전신인 한국경제인협회의 초대회장을 맡아
재계를 리드하기 시작했다.

철저한 완벽주의자였으나 한비사건 삼분파동 등 다소의 시련과 시행착오도
없지 않았다.

그는 사업보국 인재제일을 기업이념으로 한국 기업 경영을 현대화하는데
누구보다 큰 기여를 했다.


<> 이정림(개풍그룹 창업자.1913~90) =무역 시멘트 석유화학업계의 선구자.

개성 한 상회의 점원으로 출발해 고무신 도매상으로 사업을 시작했다.

49년 개풍상사라는 무역회사를 설립, 동남아로부터 고무 화학섬유원료를
수입해 임가공 판매했고 6.25와 함께 미국 일본과도 교역길을 텄다.

56년 이회림 이동준씨와 공동출자로 대한양회를 설립, 국내 최초의 문경
시멘트공장을 가동했고 70년에는 국내처음으로 폴리프로필렌을 생산하는
대한유화를 세우기도 했다.


<> 이회림(동양화학 명예회장.1917~) =마지막 개성상인.

절약과 부지런함, 신용을 바탕으로 기초화학사업을 일으켰다.

송도보통학교를 졸업하던 32년 개성의 포목상에 종업원으로 취직, 사회생활
을 시작했다.

초창기 무역업과 탄광업에 손댔던 그는 50년대 소다회라는 무기화학제품에
눈을 떠 동양화학그룹의 초석을 놓았다.

아무도 엄두를 내지 못하는, 그러나 꼭 필요한 사업분야를 찾아 위험부담을
안고 결국 1위가 되고마는 그의 경영방식이 바로 개성상인다운 면모.

<> 전택보(천우사 창업자.1901~80) =한국 수출사에 큰 획을 그은 기업가.

47년 천우사를 설립, 6.25이후 대무역상으로 성장했다.

대성목재 조선피혁을 인수했다.

허정 과도내각에서는 상공부장관을 맡기도 했다.

5.16 이후 국내 최초로 보세가공무역을 시도하는 등 60년대 중반에는 국내
최대 수출업체로 부상하는 전성기를 보냈다.


<> 정재호(삼호그룹 창업자.1913~92) =수출입국의 선구자.70년대 처음으로
1백만달러 수출을 달성했다.

금탑산업훈장 1호 수상자.

경북 예천 출신인 그는 대구 서문시장에서 가내공업으로 사업을 시작해
해방후 한때 국내 최대 기업을 경영했다.

삼호방직 대전방직 등 섬유업종을 사업의 바탕으로 삼았다.

수출기업 삼호물산은 그 당시 최고의 직장으로 손꼽히기도 했다.


<> 정주영(현대 명예회장.1915~)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불과 30년
만에 국내 정상의 기업인으로 성공한 입지전적인 인물.

부두노동자 건축공사인부 쌀배달꾼을 거치면서 사업가로서의 기질을 익혔다.

47년 현대토건사의 간판을 내걸면서 오늘날 현대의 모체를 만든다.

두둑한 배짱과 불굴의 기업가 정신으로 국내 최대 기업을 일궜다.

재계 총수인 전국경제인연합회장을 10년간 역임했다.

88년 서울올림픽 유치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나 92년 대선에 출마해
실패한 쓰라린 경험도 있다.

98년에는 금강산 관광길을 열고 남북경협사업에 본격 나서는등 통일의
기틀을 닦는데 여념이 없다.


<> 조홍제(효성 창업자.1905~84) =경남 함안에서 대지주의 아들로 태어나
일본 법정대 경제학부를 졸업했다.

해방직후인 49년 이병철 삼성 창업자와 함께 삼성의 모체인 삼성물산공사를
설립했다.

삼성에서 삼성물산 부사장, 제일모직 부사장, 제일제당 사장을 거친 그는
62년 마침내 15년간의 동업을 마치고 효성물산을 창업했다.

56세때였다.

66년 동양나이론을 인수해 효성그룹을 있게 한 기반을 다졌다.


<> 최종현(SK 전회장.1930~98) =수성에 성공한 대표적인 기업가.

맏형인 최종건 창업주가 설립한 기업을 이어받아 재계 5위 그룹으로
성장시켰다.

그는 80년 대한석유공사(구 유공, 현 SK주식회사) 민영화과정에서 삼성을
제치고 인수에 성공하는등 재계에 파란을 일으키면서 대도약의 기틀을
마련했다.

91년 울산 유공콤플렉스 완공,94년 한국이동통신 인수로 석유화학과
정보통신이라는 양대 사업축을 완성했다.

93년부터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직을 세차례나 연임하면서 창업 1세와 2세들
이 혼재했던 변혁기의 재계를 이끌기도 했다.

< 김정호 기자 jhkim@ked.co.kr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12월 20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