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만이 넘는다는 교원단체총연합회(교총)의 회원 여러분.

앞으로 저의 후원회에 정치자금을 기부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내년 총선에서 저를 낙선시키자는 캠페인을 전개하십시오.

저는 지난해 62세로 단축된 바 있는 교원의 정년을 63세로 상향조정하거나
65세로 환원하는 데 단연코 반대합니다.

전경련을 비롯한 경제인 단체의 회원 여러분께서도 똑같이 하십시오.

저는 노조전임자에 대한 임금 지급을 금지한 법조항을 삭제하는 데 찬성하기
때문입니다.

노총 관계자 여러분.

저는 전임자에게 임금을 주라고 강제하는 것에도 반대하기 때문에 저에게
똑같은 일을 하셔도 무방합니다.

저는 여러분께서 그와 같은 일을 할 자유와 권리가 있다는 것을 결코
부정하지 않습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입니다.

저는 민주공화국의 국회의원으로서 경제인단체와 교원단체들이 자기의
이익과 신념을 위해 정치활동을 전개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지지합니다.

그러니 민주공화국의 선량한 시민인 여러분도 다른 사람의 이익과 다른
신념을 옹호할 저의 자유와 권리를 인정해 주셔야 할 것입니다.

저는 산업현장에서 발생하는 모든 종류의 갈등을 노사가 자율적인 협상을
통해서 해결하는 것을 지지합니다.

불가피한 경우가 아니면 국가가 직접 개입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노조 전임자 임금 지급을 법률로 금지하는 것은 지나친 개입이라는 것이
저의 소신입니다.

전임자의 임금은 기업의 형편과 노조의 규모와 기업 경영자의 철학에 따라
줄 수도 있고 주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저는 법률로 노조 전임자의 임금을 주라고 강제하는 데 반대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주지 말라고 금지하는 법률에도 반대합니다.

만약 경제인단체가 저의 이러한 소신을 정치자금 지원 중단과 낙선운동으로
응징하겠다면 저는 그것을 소신을 지키는 데 따르는 정치적 비용으로 알고
기꺼이 받아들일 것입니다.

저는 교육 공무원의 정년이 일반 공무원들보다 높아야만 할 특별한 이유를
알지 못합니다.

노령교사 한 사람이 퇴직하면 젊은 교사 셋을 채용할 수 있다는 이른바
경제논리에 찬성하기 때문이 아니라, 좀 더 빠른 세대교체를 통해 교육현장을
지배하는 비민주적 권위주의 풍토를 약화시킬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는 학부모
단체와 입장을 같이하기 때문에 정년 단축에 찬성했습니다.

설혹 40만 교원이 총단결하여 저의 낙선운동을 벌인다 할지라도 저는 그것이
두려워 자신의 정치적 신념을 굽히는 비굴한 짓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국회의원에 당선되기 위해서 정치적 노선과 견해를 택하는 것이 아니라
제가 옳다고 생각하는 바를 실현하기 위해서 국회의원이 되려고 합니다.

저의 생각이 언제나 절대적으로 옳다고 맹신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모든 정치인이 자기가 옳다고 믿는 바를 숨김없이 밝히고 그에 따른 정치적
책임을 감수해야만 권모술수와 위선의 정치가 아니라 옳고 그름을 분명하게
가리는 생산적 정치가 이루어질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저는 노조 전임자
임금 지급 금지 조항 삭제에 찬성하고 교원 정년 환원에 반대하는 저의
입장을 거듭 밝히는 것입니다.

저를 낙선시키십시오"

20세기 마지막 정기국회가 폐회되는 순간까지 나는 누군가 이런 소신발언을
해주기를 헛되이 기다렸다.

그렇지 않아도 미지근한 김대중 정부의 개혁작업이 "돈의 힘"과 "수의 위세"
를 과시하는 이익단체에 밀려 그나마 뒷걸음질을 치고 있기 때문이다.

대의민주주의는 조직되지 않은 다수의 이익보다 조직된 소수의 이익에
끌려다닐 위험에 항상 노출되어 있다.

이런 위험에서 대의민주주의를 지키려면 누군가가 조직된 소수의 압력과
위협에 맞서 조직되지 않은 다수의 이익을 대변해야 한다.

돌팔매를 무릅쓰고 자기의 정치적 신념을 펴는 정치인이 드문 우리의
민주주의는 위험에 처해 있다.

< 시사평론가/성공회대 겸임교수 denkmal@hitel.net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12월 20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