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기말에 접어든 금년은 종말론이 가장 극성을 부린 해였다.

하늘로부터 공포의 대왕이 내려와 인류를 멸한다는 노스트라다무스의 7월
종말설의 일부는 아직도 유효하다.

그레고리오력으로 따지면 내년에 해당된다는 해석도 있으니까.

그러나 조급한 호사가들에겐 내년 여름이 너무 멀다.

좀 더 기한이 짧고 근거가 그럴듯한 종말론이 필요하다.

그래서 촉박하게 잡은 날이 올 섣달 그믐이다.

"엔드 오브 데이즈"는 할리우드의 달러 사냥꾼이 꾸며낸 지구 최후의 날이다

금세기의 마지막 돈벌이 궁리가 얼마나 적중했는지 모르지만 발상만은
흥미롭다.

노스트라다무스 예언서에 앞서는 요한 계시록을 내세워 종교적인 색채를
가미했다.

이 영화가 성서구절을 자의로 해석해 만든 말세론은 이렇다.

예언서에 나오는 666이라는 숫자를 뒤집은 999, 즉 1999년 마지막 날에
사탄이 권세를 잡아 재앙을 일으킨다는 것.

1천년이 끝나는 이날 밤 12시에 사탄이 특정 여인과 교배를 갖게 되면 신의
벌이 풀려져 인류는 끝장이다.

영화 주인공은 바로 사탄의 회생을 저지하는 전사.

우람한 근육을 자랑하는 아널드 슈워제네거가 배역을 맡았다.

음산한 종말론을 배경으로 폭력.신앙.분노.사랑 등 푸짐한 상을 차려 테마가
뒤죽박죽이다.

말세의 공포가 있는가 하면 잔혹한 폭력이 넘치고, 종교적 거룩함이 있는가
하면 활극의 황당함이 넘실댄다.

한마디로 이 영화의 복합성은 현대인과 매우 닮았다.

그것은 정서불안과 일맥상통한다.

십여년 전만 해도 이런 잡탕 스크린은 손님을 끌지 못했다.

가슴을 죄는 스릴이 있든지, 눈물을 짜는 최루성이 있든지 가부간에 어느
정도는 성격이 분명했다.

그러나 요즘 영화는 웃다 울며, 분노하다 낄낄거리기가 예사다.

관객도 그런 비정상에 동화된지 오래다.

영화와 인간에게 공존하는 성격파탄 현상이 어느쪽에서 먼저 생겨 영향을
미쳤는지 모르나 "바보상자"TV처럼 상업주의 스크린이 관객을 바보로 만든
것은 아니다.

"엔드..." 주인공의 성격은 종잡기 어렵다.

사탄과의 혈투를 끝낸 뒤 마리아상 앞에서 총을 거두고 무릎꿇는 장면에선
"저 사나이가 왜 저러나" 싶다.

신보다 총을 더 믿던 그가 어떻게 단번에 경건한 신앙심을 갖게 됐는지
설명이 없는 데도 관객들은 그의 돌출행위에 별로 의아해하지 않는다.

사탄의 모습 역시 너무 허약하다.

천년을 기다린 악의 화신이 인간의 완력앞에 허무하게 쓰러지다니...

십자가만 겁내던 중세의 사탄과 달리 총탄에 약한 것을 보면 현대의 사탄은
문명앞에 약골이 된 모양이다.

종말론 영화에 종교적 색채를 가미한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성서적 말세의 구원문제를 무자비한 폭력극으로 이끌어가는 데선
실소를 금할 수 없다.

우주전쟁으로 지구가 망하는 것도 아닌데 "터미네이터"같은 괴력의 전사를
내세워 중화기로 사탄을 물먹인다는 내용은 아무래도 할리우드의 치기와
상혼이 지나친 것같다.

< 편집위원 jsrim@ked.co.kr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12월 10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