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부터 컴퓨터는 온통 클론(clone)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차 있다.

인터넷의 어떤 사이트에 들어가건 클론에 대한 투표를 하지 않고선 넘어갈
수 없게 돼 있다.

클론이란 인간 역할을 대신하는 일종의 로봇.

2030년 완벽한 클론이 개발됐지만 20년이 지난 지금까지 양산을 하지
못한채 지리한 찬반토론이 계속되고 있다.

클론을 양산하자는 쪽은 완벽한 클론의 특허를 갖고 있는 게코사를 비롯한
진보파.

반면 인간성을 존중해야 한다는 보수파는 극렬히 반대하고 있다.

김보기씨는 컴퓨터 화면의 투표란에 대충 클릭했다.

"예스"건 "노"건 그의 의지와는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사실 그는 클론이 태어나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영역을 빼앗기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대도 이젠 지겹다.

20년간 게코사의 집요한 설득에 모든 사람들이 이력이 나 있다.

이미 게코사는 모든 행정서비스를 도맡고 있다.

치안도 그들의 몫이다.

그럴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전세계 컴퓨터망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개인의 정보도 모두 그들의 손에 들어 있다.

한번은 깜짝 놀란 적이 있다.

컴퓨터에 향후 인생설계를 정리해놓았더니 때만 되면 적절한 서비스를
하겠다는 e-메일 광고가 날아들었다.

게코서비스, 게코관광, 게코클리닉.

모두 게코의 자회사다.

김씨도 다양한 방화벽(fire wall, 외부의 해킹을 차단하는 프로그램)을
쳐 놓았지만 게코의 손아귀를 벗어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들만큼 첨단 기술을 보유한 집단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만의 정보와 기술로 게코는 번영을 거듭하고 있다.

세계는 게코의 손에 넘어가 있다.

모든 결정이 민주적으로 이뤄진다지만 그들의 손에 놀아날 뿐이다.

게코를 위한 부속품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 때가 한두번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럴수록 일반 서민들의 생활은 힘들기만 하다.

정신적으로만이 아니다.

경제적으로도 그렇다.

클론이 탄생하면 일자리를 빼앗기는 것은 일반 서민일 뿐이다.

게코의 배만 부르다.

벌써부터 한숨이 나온다.

<> 새로운 불평등의 시작

소설이나 영화의 한 장면일 수 있다.

그러나 공상과학 소설이나 영화의 경고는 첨단 과학기술이 소수 집단의
정보와 기술 독점과 합세할 때 치르게 될 인류의 희생을 암시하고 있다.

실버스타 스탤론 주연의 영화 "저지 드레드"는 서기 3000년경 소수의
"엘리트 집단"이 첨단 과학기술을 독점적으로 활용해 다수의 사회를 통제
하는 일종의 경찰국가 를 소재로 하고 있다.

저지(심판자)로 불리는 소수집단은 경찰이면서 배심원이자 동시에 집행관의
역할을 수행하는 전능한 통제자로 떠오른다.

나머지는 쓸모 없는 인간들 뿐이다.

고도 정보사회 속에서 쏟아져 나오는 정보에 짓눌린 "무기력한 인간"은
갈수록 늘어난다.

패배자들이다.

이름보다는 코드로 분류되고 남에게 자신의 정보를 모두 빼앗긴 무기력자다.

보이지 않는 권력은 모든 것을 데이터베이스화해 쉽게 통제할 수 있다.

조지 오웰의 소설 "1984년"에 나오는 "빅 브라더"가 현실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개인이 정보화로 철저히 중무장되는 뉴 밀레니엄은 과거에 존재했던 "안정된
틀"은 깨지기 마련이다.

대신 개인이 모든 것을 스스로 책임지는 사회로 변하게 된다.

정보의 바다를 능숙하게 항해해 자신에게 필요한 정보를 정확하고 빠르게
수집해 이를 유익하게 이용하는 사람은 돈도 벌고 출세도 한다.

이른바 정보화사회의 귀족이나 새로운 지배층으로 부상하게 된다.

반면 정보를 장악하지 못하고 심지어 남에게 자신의 정보를 빼앗기는
인간들은 정보화사회의 새로운 피지배계층이 될 뿐이다.

새로운 불평등의 시작이다.

<> 인류를 위한다는 과학

흔히 과학은 인류 모두를 위한 것으로 묘사된다.

산업혁명이 그랬고 20세기 과학의 발전이 그랬다.

그러나 새로운 밀레니엄으로 들어서는 문턱에 선 지금 유전자복제와 같은
과학기술이 왜 우리의 사회구조에서 필요하고 발전하게 되었는가를 물어야
한다.

진정 우리가 스스로 선택한 미래를 위해 과학기술이 봉사하길 바란다면
말이다.

유전자복제는 물론 인류를 생로병사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하는
기술이다.

그러나 그 발전 과정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유전자복제는 과학기술의 불가피한 초사회적 발전 경로가 있어서가 아니라
생명공학산업 이라는 거대한 산업체계의 일부로서 나타났고 기능하고 있다는
얘기다.

예컨대 복제양 연구도 한 제약회사의 지원으로 이루어졌다.

물론 돌리가 태어난 직후 특허도 신청됐다.

처음부터 시장과 이윤을 위해 추구되는 이러한 연구를 놓고 과학의 자율성
논리로 옹호하려는 것은 근거없는 주장이라는 의견들이 제기되고 있다.

연구하는 과학자가 인류를 위한다는 순수한 의도만을 지녔다 할지라도
과학활동이 오늘날 이윤추구에 종속되어 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이탈리아의 현대문명 비평가인 움베르토 에코는 "과학기술에는 냉혹한
법칙이 있다.

부자들이 단독으로 사용할 때는 제대로 작동한다.

그러나 가난한 자들이 손을 대면 자동으로 멈춘다"고 말했다.

정보화 혁명의 과실이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골고루 분배되지 않는다는
얘기다.

<> 정보와 기술 독점에 대한 우려

미국 연방법원은 최근 세계 소프트웨어 왕국 마이크로소프트(MS)가 개인
컴퓨터 운영 체제(OS) 시장에서 독점적 지위를 누리고 있다고 밝혔다.

MS가 막강한 힘과 막대한 수익을 앞세워 다른 회사들의 시장 경쟁 노력을
봉쇄해 왔다며 독점업체로 판정한 것이다.

MS는 이제 회사를 쪼개든지 아니면 경쟁회사에 윈도 운영체제 판매를
허용해야 하는 상황에 몰렸다.

MS는 OS시장의 80% 이상을 장악하고 있다.

독점에 따른 부작용은 벌써부터 논란이 돼 왔다.

예컨대 인터넷을 활용에 반드시 필요한 웹브라우저 인터넷 익스플로러를
윈도에 끼워팔아 선두주자 넷스케이프의 웹브라우저 사업을 포기할 단계까지
몰아넣은 것.

그러나 빌 게이츠는 MS의 사업 실적을 토대로 유사이래 최고의 갑부가 됐고
지구촌 최고의 엘리트가 돼 있다.

정보와 기술의 독점, 네오엘리트의 등장 문제는 이제 시작이나 다름없다.

정보와 기술의 독점을 막지 못한다면 인류는 21세기의 문턱에서 또다시
전제주의의 망령을 만나게 될 것이다.

< 김정호 기자 jhkim@ked.co.kr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12월 4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