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향 < 수원대 교수 / 철학 >

"하늘을 두고 그런 일이 없다"던 박주선 청와대 법무비서관이 하루만에
그런 일로 전 비서관이 되었다.

그런 문건을 본 일도, 전한 일도 없다던 박 전비서관이 하루만에 김태정
전 법무장관에게 전한 문건 전달이 문제가 돼 사퇴했다.

이런 최대의 코미디가 또 있을까.

이제 공직자의 말은 아무도 안 믿을까 봐 마음이 자꾸 휑해진다.

공직자를 믿고 싶다.

그래야 그들이 그려내는 청사진에 희망을 가질 수 있을 것 아닌가!

말이 말을 배반하면 어찌 할거나.

더구나 공직자의 말이.

허무주의가 보인다.

세계에 대한 깊은 통찰이 들어 있는 허무주의가 아니라 그 누구도 믿을 수
없고 그 어디에도 희망이 없는 그런 허무주의다.

도대체 코트 한 벌로 온 나라가 떠들썩해야겠냐고, 이젠 옷 얘기 그만하자고
나라 걱정을 하는 사람도 많은 줄 안다.

그러나 코트 한 벌로 시작한 이 사건은 코트 한 벌의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국가 기본에 관한 문제다.

국가기관들이 권력에 얼마나 무력하게 권력의 도구로 활용되어 갔는지 그
과정을 명확하게 보여준 우리의 슬픈 자화상이다.

당신은 기억하지 않는가.

김태정 전 법무장관의 부인 연정희씨가 청문회장에 나왔을 때 여당의원들의
태도를.

국민이 보고 있다는 것도 잊고 청와대가 보고 있다는 것만 의식하고 있었던
그 사람들의 태도를.

진실보다는 충성 경쟁에 목멨던 그이들을.

그리고 기억하는가.

그 사안에 대해 "내사는 했지만 고관부인이 혐의가 없어 정식으로 입건해
수사하지 않았다"고 말했던 청와대 직속의 총경의 말을.

청와대에서 철저히 조사해 범죄행위가 없는 것으로 결론을 내린 사안인데
검찰이 나설 필요가 없다고 했던 검찰을.

그러다가 고관 부인의 고소로 하루 만에 본격 수사를 착수해서 고관 부인의
혐의를 벗기기에 급급했던 검찰을.

고관 부인의 고소도 검찰의 그런 행태를 예감하고 검찰을 얕본 고소가
아니었을까.

억울하니 고소장을 내겠다는 고관 부인의 의지는 얼마나 기막힌 것이었을까.

그 고관 부인의 의지는 고관인 남편의 의지와 관계 없었을까.

진실보다는 힘에 약한 검찰이라고 판단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검찰을 지휘
감독하는 법무부장관직을 사퇴하지도 않은 채 고소장을 내 검사에게 소환
수사를 시킬 수 있었을까.

기본이 안 돼있었다는 증거 아닐까.

김태정 전 법무장관은 이미 검찰총장 시절 야당에 의해 탄핵의 대상으로
지목돼 있었던 사람이었고 시민단체에 의해서도 문제가 제기되었던 사람이다.

도대체 그런 이를 막강한 권력의 법무부장관으로 임명했어야 했던 이유는
뭘까.

그렇게 기본도 안 된 사람을 왜 대통령은 "개혁"이라는 말도 안 되는 이름
으로 포장하여 법무부장관에 앉혔었을까.

거기에는 잘못된 보고서도 한몫 했을 것이리라.

대통령께 올라가는 보고서가 허위보고서였다니.

그 허위보고서를 믿고 대통령은 언론이 연씨를 마녀사냥식으로 몰고가서는
안 된다고 편들어주기도 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왜 그런 사람들을 대통령은 요직에 앉혔을까.

단순히 사람을 잘못 봐서일까.

사람을 잘못 봐서 나라 망치는 경우를 많이 보고 지적한 정치인 DJ는 정권을
잡으면 인사청문회를 하겠다고 확신에 찬 어조로 가뿐하게 공약했다.

우리는 그것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그것은 권력을 남용하지 않고 적재적소에 사람을 배치하겠다는 의지로
보였었다.

그러니까 인사청문회는 DJ의 공약 중의 공약인 셈이다.

DJ에게 표를 던진 사람은 그것을 철석 같이 믿었으리라.

그런데 대통령이 된 DJ는 최초의 조각에서 인사청문회를 하지 않고 장관들을
임명했다.

무슨 이유였을까.

최초의 조각이니 만큼 시간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 이유였다.

그런데 "준비"된 대통령에게 아직도 시간이 없을까.

인사청문회를 하지 않을 경우라면 인사청문회를 해도 문제가 되지 않을
사람을 골라야 한다.

그런 선발과정이 참다운 ''인사'' 아니겠는가.

그것이 인사청문회를 공약하고, 그래서 그 공약사항을 믿었던 국민에 대한
대통령의 진정한 예의가 아닐까.

그렇지 않는 한 국민의 정부는 국민에 대한 예의가 없는 무례한 정부였다는
평가를 들을 수도 있다.

< ja1405@chollian.n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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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 약력

=<>이화여대 철학박사
<>이화여대 강사
<>서울방송(SBS) 라디오칼럼 진행자
<>논문:근대성과 한국문화의 정체성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12월 1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