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미스터 실버] (1) '한국의 노인 현주소'
손을 내미는 이도 없고 한탄을 들어주는 곳도 없다.
뼈빠지게 고생해 키운 자식들은 이런저런 사정으로 저살기에 바쁘다.
정부는 다른 곳부터 신경쓰느라 노인들을 돌아볼 여지가 없다.
이젠 늙은게 죄다.
남은 여생은 스스로 돌보아야 한다.
부담줄까봐 내색도 못한다.
물론 드물게는 화려하게 노년을 즐기는 "골든 에이지"도 없지는 않다.
하지만 대다수의 노인들은 더이상 "무관심"을 탓할 기력도 잃은 상태다.
70년대 장관까지 지낸 A씨.
그는 지금 한 독지가의 도움으로 살고 있다.
그런 사실은 알만한 사람은 다 안다.
그는 은퇴후 남부럽지 않게 새삶을 시작했다.
제대로 쉬어보지도 못하고 관료생활을 끝낸 그에겐 넉넉한 시간 그 자체가
행복이었다.
그런대로 노후를 보낼 만큼의 돈도 모아두었다.
은퇴후에도 용돈벌이도 괜찮았다.
화려한 경력을 바탕으로 각종 강연과 세미나에 나가 웬만한 월급쟁이 몫은
벌 수 있었다.
그런 그가 이젠 남에게 기대 산다.
사업하는 아들에게 몽땅 주었다가 사업이 실패해 한푼도 건지지 못했다.
여기에다 IMF로 용돈벌이까지 뚝 끊겼다.
무일푼 신세가 되고 말았다.
이젠 힘도 없다.
남은 것은 탄식 뿐이다.
대기업그룹 계열사 사장까지 지낸 B씨의 불행한 말년도 혀를 차게 한다.
5년전 퇴직한 그는 자식들간의 재산싸움을 막겠다며 재산을 미리 나누어
주었다.
하지만 아들은 말할 것도 없고 그렇게 잘하던 며느리들의 발길마저 끊겼다.
느닷없이 국세청에서 증여세 통지서가 날아들었지만 세금을 내주겠다고
나서는 자식은 없었다.
이젠 먼저 저세상으로 간 아내가 부러울 뿐이다.
"돈은 죽을 때까지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신신당부하던 아내의 말을
들었어야 했다고 회한하지만 소용없는 일.
그는 "자식이 원수가 됐다"고 탄식한다.
서울 을지로에서 꽤 큰 지물포를 하던 C씨.
80이 넘었지만 노부부가 쓸쓸하게 산다.
그 많던 재산은 미국에 사는 아들과 딸이 다 가져갔다.
자녀들을 출세시키겠다고 미국에 유학을 보낸 것이 자식과 생이별로 결말이
나고 말았다.
아들은 자꾸 미국으로 들어오라고 하지만 말도 안통하고 혼자서는 집밖에도
나갈 수 없는 그곳은 감옥이나 다름없다.
전화는 종종 오지만 이런저런 이유 때문에 아들 본지가 벌써 3년이 넘었다.
이들처럼 자식들에게 물려주고 후회하는 경우는 그나마 낫다.
아예 자식들로부터 버림받은 노인들에 비할 바가 아니다.
서울구경 가자는 자식말을 듣고 따라나섰다가 서울 한복판에서 버려지는
"세기말적 고려장"이 아직도 벌어지고 있다.
경기도의 한 양로원에서 여생을 보내고 있는 D할머니(82)는 지난 봄 충남
논산에서 며느리와 함께 서울로 왔다가 혼자만 남겨졌다.
집을 알지만 찾아가지 않는다.
"손자들이 보고싶어 죽을 지경"이라는 할머니는 아들이 찾아올 날만 꼽고
있다.
다들 그런 것만은 아니다.
올해 84세인 E할머니는 "하루하루가 행복하다"고 입버릇처럼 말한다.
재산이 많아서가 아니다.
자식들의 효도가 남달라서도 아니다.
봉사활동을 통해 스스로 즐거운 삶을 살기 때문이다.
할머니는 매일 자신의 집 근처에 있는 어린이시설을 찾아가 아이들을
돌본다.
"힘들지만 몸을 가누지 못하는 어린 것들을 씻겨주다 보면 힘이 생긴다"고
말한다.
이렇게 할일을 스스로 찾을 수 있을 때는 별 문제가 안되지만 그렇지 못한
노인들을 보호하는 것은 결국 사회와 정부의 몫이다.
가족으로부터의 소외, 사회에서의 홀대, 건강 상실, 제도적 보호권에서의
고립, 경제적 빈곤, 정신적 황폐화로부터 건져내는 일이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9월 27일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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