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시장을 맘대로 조정할 수 있다는 환상에 사로잡힌 것 같다"

20조원의 채권시장안정기금을 조성해 금융시장을 안정시키겠다는 정부방안에
대한 한 은행장의 푸념이다.

벌써 일부 은행에서는 이사회에서 기금출자를 반대하겠다는 소리도 나오고
있다.

물론 금융시장 불안을 해소해야한다는 대명제에는 누구나 찬성하고 있다.

기금조성이 불가피한 정책이라는 의견도 적지않다.

실제로 기금으로 채권을 사들이면 일단 금리는 안정될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기금운영의 투명성이다.

더욱이 이후 기금이 부실화되면 그 책임을 누가 질 것인가라는 문제도 아직
풀리지 않았다.

은행들이 이번 기금조성에 불만을 갖는 것도 이래서다.

금융계 관계자는 "정부가 지분을 갖고 있는 은행들은 꿀먹은 벙어리꼴"이라
며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끌려다니고 있다"고 지적했다.

정부의 이번 기금조성방안은 이전 증시안정기금을 떠올리게 한다.

지난 90년에도 주가가 폭락하자 정부는 증권사들을 독려해 2조원의 기금을
만들었다.

당초 설립때는 2년간만 운영하고 해산한다는 게 방침이었다.

그러나 그게 어디 출자자들의 뜻대로 되는가.

96년에는 4조원까지 증액됐다.

일부 자금을 돌려주기는 했지만 여전히 1조8천억원이 남아있다.

그동안 정부는 이 기금을 자기 쌈지돈처럼 써왔다.

증시상황이 안좋으면 주식매수에 나서도록 했다.

시장안정용으로 운영하다보니 제대로 수익을 못내는 것도 당연하다.

증권계에 따르면 현재 증시안정기금은 원본의 35%가량을 까먹고 있다.

출자기관들만 속앓이를 하고 있다.

이번에 설립되는 채권안정기금이 증안기금의 재판이 되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다.

이 기금 역시 운용기간을 1년으로 잡았다.

그러나 "필요하면 연장할 수 있다"는 단서조항도 달았다.

금융계에서는 은행돈을 정부가 맘대로 쓰려는 속셈이라고 반발하고 있다.

차라리 은행이나 보험사별로 별도의 기금을 만들고 각자가 운용을 책임
지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견도 이래서 나온다.

기금운용의 투명성과 자율성이 보장돼야한다는 것이다.

시장이 불안할때마다 금융기관의 주머니를 털어 기금을 조성하는 방안은
시장을 무시한 "기금만능주의"가 아닐까.

혹시나 새로운 시장불안요인을 만들지 않을까 걱정된다.

< 김준현 경제부 기자 kimjh@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9월 22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