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F 극복 주부생활 수기] '대상' .. '빵집 사장을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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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안임 <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서현동 효자촌아파트 >
92년 결혼을 하고 맞벌이 2년후에 정은이가 태어나면서 퇴직을 했다.
수입은 줄었지만 곧 한살 터울로 영재를 낳은 우리 부부는 풍족하다고 할
수는 없어도 남부럽지 않게 행복한 가정을 꾸려 갔다.
생명보험회사에 근무하던 남편이 결혼후 임대회사로 옮기면서 잠시 실직
상태를 경험했지만 다행히 길지 않았고 남편은 곧 자리를 잡았다.
흐르는 강물같던 우리 가정의 행복은 97년 말 외환위기가 터지면서 급격한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됐다.
남편의 명예퇴직이었다.
퇴직금과 위로금등 3천만원 정도의 목돈을 손에 쥔채.
그러나 불행은 한꺼번에 찾아온다더니 퇴직과 동시에 또 다른 검은 그림자
가 우리 가정을 덮쳤다.
남편이 보증서 준 과거 직장 상사의 부도로 8천만원 가량의 빚을 덮어쓰게
됐다.
급기야는 살고 있던 아파트에까지 압류가 들어오고 말았다.
다행히 시부모님의 도움으로 해결은 됐지만 우리 가족의 미래를 준비하는
일은 여전히 막막했다.
남편은 이것저것 한다며 6개월 이상 허비했다.
처음에는 미국공인회계사(AICPA)를 한다고 학원 몇달 다니더니 아무래도
경쟁이 치열해서 안되겠다며 공무원시험으로 방향전환했는데 그도 얼마가지
못했다.
다단계판매회사의 사업설명회도 가보고 한두 군데 이력서를 내보기도
했지만 어차피 시간낭비일 뿐이었다.
남편은 조직생활에 적합한 사람이 아니었다.
주변 친구와 선배들을 찾아다니며 자문을 구하다 결국 내린 결론은 "제빵
기술"이었다.
다소 늦긴 했지만 지금이라도 열심히 한다면 5년내에 조그만 제과점을
차릴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에서다.
남편은 우선 제대로 제빵기술을 배워야 한다는 생각에서 제빵기술의 선진국
인 일본유학을 결심하게 됐다.
일본의 비싼 물가와 생활비 때문에 남편 혼자만 일본으로 떠나고 나와
아이들은 이곳에 남아 있기로 한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지만 어쩔 수 없었다.
시댁에서는 남편의 학비를 대주셨지만 여기 남은 식구의 생활비에는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할 수 없이 내가 생활전선에 뛰어들어야 했다.
처음에는 아쉬운대로 동네의 자잘한 아르바이트 일감을 찾아 뛰는 것으로
시작했다.
하루는 농장에서 계란과 김을 한 세트로 묶어 아파트내 집집마다 샘플을
돌리고 주문을 받아오는 일을 지원했다.
두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을 혼자 해치워서 일당을 다 챙기겠다고 욕심을
부리며 나섰다가 큰 고생을 했다.
아파트 10개동에 하룻동안 배달하고 다음날 남은 물건 회수및 주문접수를
대행하는 일이었는데 9백가구 이상에 배달하는 일 자체가 엄청난 노동이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맨 윗층으로 올라가서 한층씩 계단을 내려오며 배달하는
단순작업, 그리고 다음날 똑같은 일을 반복해 받은 일당은 7만원.
퉁퉁 부어버린 다리를 가누지 못해 몸져 누워서 만원짜리 7장을 만지작
거리는데 왜 그렇게 눈시울이 뜨겁던지.
아이들이 유치원과 학원에 간 사이 간단히 해치울 수 있는 아르바이트를
몇번 하다보니 아무래도 제대로 된 일자리를 잡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찾은 일은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봉제공장의 단순
노동직이었다.
그래도 한때는 사무실에서 PC 만지고 전표 써가며 일하던 아가씨(남편과는
전직장인 생명보험사의 사내 커플이다)가 완전한 아줌마가 되어서 봉제공장
에 출근했다.
아이들 뒷바라지 때문에 남들보다 짧은시간 밖에 일할 수 없어 따로 집에서
손을 놀릴 수 있는 액세서리 조립도 일거리로 받아 왔다.
집안은 청소부족으로 늘 지저분하고 액세서리 부스러기들이 널려 있는
모습이 심란스러웠다.
그러한 것들이 자꾸 나를 슬프게 하는 악순환에 깊은밤 혼자 잠자리에서
베갯잇을 적신 적도 여러번이었다.
지난 5월부터는 다행히도 남편 친구가 주선해서 집근처 카센터의 경리로
옮기게 됐다.
개인회사의 경리일이다보니 일감도 많지 않고 시간도 크게 구애받지
않으면서 보수는 봉제공장 다닐 때와 비슷해 아주 만족스러웠다.
다만 아직 아이들이 어려서 이런 일로 충격받을 이유는 없어 보이지만
하루빨리 남편이 공부를 마치고 돌아와서 가게를 차려야만 안정이 될텐데
혹시라도 그 도중에 별일이 없을지 늘 불안한 마음이 한구석에 남아 있다.
생활비를 버는 것 말고도 절약이 또 하나의 소득인 것이야 두말할 필요도
없다.
한달평균 25만원이 들어가는 두 아이의 교육비를 제외하고는 입을 옷과
먹거리를 기본으로 절약계획을 추진해 갔다.
옷은 절대 사지 않고 있는 것을 최대한 깨끗하게 해서 입었다.
외식은 가끔 사주는 햄버거 외에는 일체 끊었다.
할인점에 쇼핑갈 때 시식용으로 나눠주는 음식들이 아이들의 즐거운 간식
거리가 됐다.
아이들의 식생활이 간식에 편중되거나 밥 투정을 없애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는 것을 위안삼아 설움을 삭일 수 있었다.
또 신문구독을 끊은지 오래이고 가지고 있는 소형차는 처분해 봐야 실익이
없을 것 같아 운행자제로 방향을 정하고 대신에 그동안 창고에 두었던 낡은
자전거를 활용하고 있다.
가끔 차를 운전해도 에어컨 가동은 사치스런 일이고 장거리는 아예 버스를
탄다.
전화는 수신전용으로 바꾸고 발신은 아파트 단지입구의 공중전화를 활용
한다.
비디오 대여는 사치.
TV의 영화 시청으로 대신하며 정신의 공허를 메우기 위해, 그리고 아이들
에게 변함없는 엄마의 모습을 보이기 위해 구청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부지런히 읽고 있다.
라디오의 클래식 프로그램을 늘 틀어 주었으며 아이들에게 필요한 문화생활
역시 EBS방송의 뮤지컬이나 오페라로 대신했다.
무엇보다 집근처 공원의 호숫가를 가끔 산책하는 것이 아이들 정서순화에
큰 도움을 주고 있다.
아파트 지하 1층의 헌옷 보관소에 가끔 들르고 신문지나 헌책을 버리는
재활용센터에서는 멀쩡한 책이나 장난감을 심심찮게 건져낸다.
밑반찬이나 김치는 혼자 담가 먹어봐야 비용만 많이 들어 당분간 친정신세
를 지기로 했다.
남편과의 국제전화는 앞집 대학생이 사용하는 E메일을 통해 주고 받는
것으로 대신했다.
남편이 자존심을 꺾고 실리를 택하면서 힘든 일본 유학생활을 하는 만큼
이곳에 남은 나는 나대로 아이들을 건강하게 잘 키우며 인내심으로 미래의
행복을 기다려야 한다.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는 몰라도 희망없이 무너지는 것보다는 백번 낫다.
마음이 여린 남편을 대신해 우리 가정을 책임지고 있는 두 아이의 엄마로서
적어도 2년은 더 겪어야 할 시련을 극복하기 위해 두 팔에 힘을 주고
"파이팅"을 힘차게 외쳐 본다.
( 요약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9월 18일자 ).
92년 결혼을 하고 맞벌이 2년후에 정은이가 태어나면서 퇴직을 했다.
수입은 줄었지만 곧 한살 터울로 영재를 낳은 우리 부부는 풍족하다고 할
수는 없어도 남부럽지 않게 행복한 가정을 꾸려 갔다.
생명보험회사에 근무하던 남편이 결혼후 임대회사로 옮기면서 잠시 실직
상태를 경험했지만 다행히 길지 않았고 남편은 곧 자리를 잡았다.
흐르는 강물같던 우리 가정의 행복은 97년 말 외환위기가 터지면서 급격한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됐다.
남편의 명예퇴직이었다.
퇴직금과 위로금등 3천만원 정도의 목돈을 손에 쥔채.
그러나 불행은 한꺼번에 찾아온다더니 퇴직과 동시에 또 다른 검은 그림자
가 우리 가정을 덮쳤다.
남편이 보증서 준 과거 직장 상사의 부도로 8천만원 가량의 빚을 덮어쓰게
됐다.
급기야는 살고 있던 아파트에까지 압류가 들어오고 말았다.
다행히 시부모님의 도움으로 해결은 됐지만 우리 가족의 미래를 준비하는
일은 여전히 막막했다.
남편은 이것저것 한다며 6개월 이상 허비했다.
처음에는 미국공인회계사(AICPA)를 한다고 학원 몇달 다니더니 아무래도
경쟁이 치열해서 안되겠다며 공무원시험으로 방향전환했는데 그도 얼마가지
못했다.
다단계판매회사의 사업설명회도 가보고 한두 군데 이력서를 내보기도
했지만 어차피 시간낭비일 뿐이었다.
남편은 조직생활에 적합한 사람이 아니었다.
주변 친구와 선배들을 찾아다니며 자문을 구하다 결국 내린 결론은 "제빵
기술"이었다.
다소 늦긴 했지만 지금이라도 열심히 한다면 5년내에 조그만 제과점을
차릴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에서다.
남편은 우선 제대로 제빵기술을 배워야 한다는 생각에서 제빵기술의 선진국
인 일본유학을 결심하게 됐다.
일본의 비싼 물가와 생활비 때문에 남편 혼자만 일본으로 떠나고 나와
아이들은 이곳에 남아 있기로 한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지만 어쩔 수 없었다.
시댁에서는 남편의 학비를 대주셨지만 여기 남은 식구의 생활비에는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할 수 없이 내가 생활전선에 뛰어들어야 했다.
처음에는 아쉬운대로 동네의 자잘한 아르바이트 일감을 찾아 뛰는 것으로
시작했다.
하루는 농장에서 계란과 김을 한 세트로 묶어 아파트내 집집마다 샘플을
돌리고 주문을 받아오는 일을 지원했다.
두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을 혼자 해치워서 일당을 다 챙기겠다고 욕심을
부리며 나섰다가 큰 고생을 했다.
아파트 10개동에 하룻동안 배달하고 다음날 남은 물건 회수및 주문접수를
대행하는 일이었는데 9백가구 이상에 배달하는 일 자체가 엄청난 노동이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맨 윗층으로 올라가서 한층씩 계단을 내려오며 배달하는
단순작업, 그리고 다음날 똑같은 일을 반복해 받은 일당은 7만원.
퉁퉁 부어버린 다리를 가누지 못해 몸져 누워서 만원짜리 7장을 만지작
거리는데 왜 그렇게 눈시울이 뜨겁던지.
아이들이 유치원과 학원에 간 사이 간단히 해치울 수 있는 아르바이트를
몇번 하다보니 아무래도 제대로 된 일자리를 잡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찾은 일은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봉제공장의 단순
노동직이었다.
그래도 한때는 사무실에서 PC 만지고 전표 써가며 일하던 아가씨(남편과는
전직장인 생명보험사의 사내 커플이다)가 완전한 아줌마가 되어서 봉제공장
에 출근했다.
아이들 뒷바라지 때문에 남들보다 짧은시간 밖에 일할 수 없어 따로 집에서
손을 놀릴 수 있는 액세서리 조립도 일거리로 받아 왔다.
집안은 청소부족으로 늘 지저분하고 액세서리 부스러기들이 널려 있는
모습이 심란스러웠다.
그러한 것들이 자꾸 나를 슬프게 하는 악순환에 깊은밤 혼자 잠자리에서
베갯잇을 적신 적도 여러번이었다.
지난 5월부터는 다행히도 남편 친구가 주선해서 집근처 카센터의 경리로
옮기게 됐다.
개인회사의 경리일이다보니 일감도 많지 않고 시간도 크게 구애받지
않으면서 보수는 봉제공장 다닐 때와 비슷해 아주 만족스러웠다.
다만 아직 아이들이 어려서 이런 일로 충격받을 이유는 없어 보이지만
하루빨리 남편이 공부를 마치고 돌아와서 가게를 차려야만 안정이 될텐데
혹시라도 그 도중에 별일이 없을지 늘 불안한 마음이 한구석에 남아 있다.
생활비를 버는 것 말고도 절약이 또 하나의 소득인 것이야 두말할 필요도
없다.
한달평균 25만원이 들어가는 두 아이의 교육비를 제외하고는 입을 옷과
먹거리를 기본으로 절약계획을 추진해 갔다.
옷은 절대 사지 않고 있는 것을 최대한 깨끗하게 해서 입었다.
외식은 가끔 사주는 햄버거 외에는 일체 끊었다.
할인점에 쇼핑갈 때 시식용으로 나눠주는 음식들이 아이들의 즐거운 간식
거리가 됐다.
아이들의 식생활이 간식에 편중되거나 밥 투정을 없애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는 것을 위안삼아 설움을 삭일 수 있었다.
또 신문구독을 끊은지 오래이고 가지고 있는 소형차는 처분해 봐야 실익이
없을 것 같아 운행자제로 방향을 정하고 대신에 그동안 창고에 두었던 낡은
자전거를 활용하고 있다.
가끔 차를 운전해도 에어컨 가동은 사치스런 일이고 장거리는 아예 버스를
탄다.
전화는 수신전용으로 바꾸고 발신은 아파트 단지입구의 공중전화를 활용
한다.
비디오 대여는 사치.
TV의 영화 시청으로 대신하며 정신의 공허를 메우기 위해, 그리고 아이들
에게 변함없는 엄마의 모습을 보이기 위해 구청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부지런히 읽고 있다.
라디오의 클래식 프로그램을 늘 틀어 주었으며 아이들에게 필요한 문화생활
역시 EBS방송의 뮤지컬이나 오페라로 대신했다.
무엇보다 집근처 공원의 호숫가를 가끔 산책하는 것이 아이들 정서순화에
큰 도움을 주고 있다.
아파트 지하 1층의 헌옷 보관소에 가끔 들르고 신문지나 헌책을 버리는
재활용센터에서는 멀쩡한 책이나 장난감을 심심찮게 건져낸다.
밑반찬이나 김치는 혼자 담가 먹어봐야 비용만 많이 들어 당분간 친정신세
를 지기로 했다.
남편과의 국제전화는 앞집 대학생이 사용하는 E메일을 통해 주고 받는
것으로 대신했다.
남편이 자존심을 꺾고 실리를 택하면서 힘든 일본 유학생활을 하는 만큼
이곳에 남은 나는 나대로 아이들을 건강하게 잘 키우며 인내심으로 미래의
행복을 기다려야 한다.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는 몰라도 희망없이 무너지는 것보다는 백번 낫다.
마음이 여린 남편을 대신해 우리 가정을 책임지고 있는 두 아이의 엄마로서
적어도 2년은 더 겪어야 할 시련을 극복하기 위해 두 팔에 힘을 주고
"파이팅"을 힘차게 외쳐 본다.
( 요약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9월 18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