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머노믹스] (여성 파이어니어) '김정실씨' .. 초고속 성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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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실리콘밸리의 숱한 벤처기업 가운데서도 단연 돋보이던 자일랜(Xylan).
이 회사를 키운 "자일랜 신화"의 주역 김정실(47)씨가 한국의 벤처캐피털
시장에 진출했다.
창업 6년만에 기업가치를 2백배로 키운 김씨가 한국의 벤처기업을 키우겠다
며 창업투자사 와이즈-내일 인베스트먼트에 1천만달러를 투자한 것.
와이즈-내일의 출범기념식에 참석하기 위해 내한한 그는 성공스토리를
한국경제신문에 공개했다.
<> 미국에 도착한 뒤 =서강대 전자공학과 출신의 스티브 김(한국명 김윤종)
과 결혼, 76년에 도미했다.
스티브는 낮에는 창고에서 짐을 나르고, 밤에는 캘리포니아 주립대학원에서
전자공학을 전공하며 미국 생활에 적응해갔다.
유학생의 내조자로서 모든 것이 어려웠던 시절이다.
석사과정을 끝낸 스티브는 세일로 등의 방위산업체 통신장비 디자이너로
취직했다.
연봉 6만~7만달러의 안정된 샐러리맨 생활이 시작됐다.
그러나 스티브는 꽉 막힌 조직 운영 방식에 좌절하기 시작했다.
중소기업으로 자리를 옮겨 2년여쯤 광섬유를 이용한 통신시스템 개발에
매달리더니 자신의 회사를 직접경영하고 싶다는 뜻을 의논해 왔다.
벤처기업가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스티브의 나이도 벌써 서른 다섯.
두 아이의 가장으로 우리 가족이 안정적인 샐러리맨의 자리를 털어 버리고
새로운 모험을 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한국에 있는 가족 등 주위에서의 반대가 컸지만 일단 결심하고 나자 스티브
와 나는 면밀히 사업계획을 점검했다.
기술은 무엇보다 자신이 있었다.
컴퓨터를 이용한 통신망 분야는 폭발적인 성장을 예고하고 있었다.
당시로는 최첨단 기술이라고 할수 있는 광섬유를 이용한 데이터 통신시스템
에 대한 확실한 기술을 축적해 놓고 있던 터였다.
<> 차고에서 창업 =지난 84년 스티브와 함께 그동안 계를 통해 모은 돈과
저축한 돈을 합해 1만달러를 창업자금으로 모았다.
몇몇 친구들의 격려와 도움 속에서 집 근처 차고를 빌려 파이버먹스
(Fibermux)라는 광역통신망(WAN) 장비업체를 설립했다.
제품개발은 스티브의 몫으로 떨어졌다.
하루 24시간이 모자랄 정도로 제품 연구에 매달리는 숨가쁜 생활이 시작
됐다.
그러나 기업경영의 현실에서 가장 먼저 발목을 잡는 것은 자금이었다.
미국 비즈니스 관행을 모르고 처음으로 기업경영을 시작한 우리로서는 모든
것이 넘을 수 없는 높은 벽으로 다가 왔다.
허리띠를 졸라매고, 생활비를 줄이는 일부터 그때 그때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는 일까지, 개발이 끝나면 자금이, 자금이 마련되면 마케팅이, 마케팅
문제에 허덕이다 보면, 인력관리 문제가 끝없이 부딪쳐 왔다.
세금 경리 법률 등.
비용을 아끼고, 투자자들을 만나 자금을 모으고, 기약 없는 벤처기업에
투자한 친구들을 안심시키고, 회계나 인원관리 등 일상적인 업무는 내가
직접 나서서 해결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의 경험이 나중에 자일랜을 설립하는 소중한 밑거름이 됐다.
1년 반의 연구 끝에 파이버먹스 이름으로 광섬유를 이용한 데이터통신
시스템을 개발했다.
광섬유를 이용한 데이터 통신시스템이 바로 그것.
파이버먹스는 이 시스템의 성능을 인정받으면서 성장을 거듭했고, 설립
첫해 80만달러의 매출을 올렸다.
<> 내친김에 나스닥까지 =파이버먹스는 미국해군성과 항공우주국(NASA)에
납품하는 등 기술력을 인정받았다.
91년엔 나스닥 상장을 검토할 정도로 자리를 잡았다.
나스닥 상장이라는 어메리칸 드림을 실현할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이었다.
그러나 나스닥 상장은 기술력있는 제품을 개발해서 시장에 내다 파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기업의 영업력과 기술력을 미래가치와 함께 상장하는 일이다.
기업의 비전을 만들고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자신만의 미래가치를 만들어
가는 진짜 기업경영이 요구됐던 것이다.
초기에 혼자 끙끙 앓아가며 문제를 해결해 왔던 경험이 하도 절실해 사업이
본 궤도에 오르자마자 훌륭한 인재를 찾고 관리하는데 온갖 정성을 기울였다.
구멍가게든 초대형 기업이든 경영자가 최종 판단을 내리고 기업의 사업방향
을 설정하게 되지만, 이런 계획을 다듬고 실무영역에서 실수가 없도록 하는
일은 전문 경영인들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 작전상 후퇴 =나스닥 상장을 포기하고 더 큰 꿈을 위해 매각 제의가
들어와 있었던 ADC사에 파이버먹스를 매각키로 결정했다.
매각 대금은 5천4백만달러.
투자자들에게 이미 20배 이상의 이익을 돌려 주었다.
우리 역시 85년 파이버먹스 설립 이후 겪어 왔던 고생을 충분히 보상받고
남을 정도로 큰 수익을 올렸다.
스티브는 ADC에 2년간 계약직 경영인으로 묶이게 됐다.
미국 사회는 단순히 회사를 사들이는게 아니라 인력을 사들인다는 개념이
철저한 나라였다.
<> 자일랜 태동 =ADC와의 계약기간이 끝날 무렵, 이미 통신장비의 흐름이
바뀌고 있음을 간파하고 있던 우리는 더 이상 머뭇거릴 시간이 없음을 알고
있었다.
인터넷 시대가 빠른 속도로 열리고 있었다.
기업경영에도 어느 정도 자신이 생겼다.
파이버먹스 시절 동고동락하며 회사를 함께 이끌었던 유리 피코버를 투자
파트너겸 제2인자로 선임했다.
또 6명의 인재를 모아 자일랜을 설립하고 제2의 창업에 나섰다.
유리 피코버는 15세때 이민 온 러시아계 미국인으로 천재적인 세일즈맨이다.
자일랜을 설립한 우리는 정말 자신만만하고 신나는 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기존의 재래식 장비를 갖고 있던 대형업체들은 고작해야 합병(M&A)을 통해
기술을 확보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대형업체들은 시대조류를 민첩하게 타기엔 너무 큰 공룡이었고, 독자적인
기술을 갖고 있는 우리를 당하기엔 축적된 기술이 없었던 것이다.
<> 시련과 기회 =하지만 세상일은 뜻대로만 되는건 아닌 모양이다.
파이버먹스사를 매입했던 ADC사가 소송을 걸어 왔다.
유사업종에서 유사제품을 만들지 않겠다는 ADC사와의 계약을 어겼다는
것이다.
한시가 급하고, 아까운 순간에 길고 지루한 미국식 소송에 걸려 들고 만
것이다.
끝없는 소환과 변론작성, 미래를 알 수 없는 불안감.
모든걸 하루아침에 잃어 버릴 위기에 처했다.
천문학적인 손해배상금을 요구해 오는 대기업을 상대로 미국식 소송을
감당할 자신이 정말 없었다.
몇달간 스티브는 법원으로 불려 다니면서 힘겨운 과정을 겪었다.
기술 개발은 고사하고 벤처기업가로서의 꿈마저 포기하고 직장생활로 다시
돌아갈까 고민할 정도로 스티브는 탈진상태에 빠졌다.
그러나 인터넷 물결은 밀려오고 있었다.
파이버먹스의 성공도 ADC사의 예민한 반응도 이를 반증해주는 충분한 증거
였다.
스티브를 설득했다.
"이 고비만 넘깁시다. 충분히 성공할 수 있어요"
스티브가 법원으로 불려 다니는 동안 나와 동료들은 그동안 파이버먹스사를
운영하며 쌓아 놓은 투자인맥과 마케팅 네트워크를 총동원해 자일랜의
기틀을 닦는 작업을 진행했다.
다행히 소송이 장기전으로 진행되면서 자일랜에서 생산되는 제품이 ADC
제품과는 다르다는 것을 입증시켰다.
향후에도 유사한 제품은 만들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는 선에서 ADC와의
문제는 해결됐다.
소송문제가 해결되자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됐다.
94년초 브란트우드라는 벤처캐피탈의 자금 1천만달러가 자일랜에 투자됐고,
알카텔사의 투자가 이어지면서, 2년 동안의 철저한 연구개발이 시작됐다.
스티브와 나는 유능한 인재에 돈을 아끼지 않았다.
CIO(정보담당 최고경영자) CFO(재무담당 최고경영자) 등 미국식 특유의
전문 경영인들을 VP(Vice President)로 스카우트했다.
상장을 위해 하버드법대 출신의 한국계 변호사와 한국계 공인회계사(CPA)를
영입했다.
좋은 인재를 선별할 수 있는 안목과 이들 훌륭한 인재들이 최고의 기량을
발휘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이야말로 사업을 성공으로 이끄는
평범한 진리였던 것이다.
직원들과의 공동체의식도 중시했다.
주중은 물론 주말에도 회사에서 한사람이라도 일을 하는 한 항상 점심,
저녁을 제공했다.
시간에 쫓기는 이유도 있었지만 같은 배를 탄 공동운명체라는 의식을 심어
주고 싶었다.
결과는 만족스러웠다.
스톡옵션을 제시했기 때문에 직원들 모두 자기 회사라는 생각을 갖고
열심히 일해 주었다.
3개월에 한번씩 전직원을 강당에 모아놓고 회사의 경영상태를 공개했다.
본사 이외의 직원들과는 전화회의를 통해서라도 직원들이 최고경영자와
같은 정보를 가지고, 같은 목표를 가질 수 있도록 했다.
96년에는 타임지 선정 100대 초고속 성장기업 1위를 차지할 정도로 성공
가도를 달리기 시작했다.
<> 상장 게임 돌입 =주간사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모건 스탠리를 선정했다.
법률팀은 자일랜사의 고문 변호사였던 한국계 남태희 변호사가 맡았고,
회계부문은 피트 마릭스(Peat Marwick) 회계법인이 담당케 했다.
IPO를 담당했던 전문가들을 보면서 정말로 나는 많은 존경심을 가졌다.
30대 젊은 그룹으로 구성된 이들은 지칠줄 모르는 정열과 확신을 갖고
각자의 분야를 책임지며 상장 게임을 펼쳤다.
상장 게임은 긴박하게 전개됐다.
모건스탠리팀은 상장날짜를 잡아 놓고 미국 전역을 도는 투자자 유치
전략을 폈다.
미국은 넓은 나라였다.
구석구석 우리에게 관심을 가져줄 만한 투자자들을 한사람이라도 건지기
위해 전세 비행기를 동원, 하루에 6~7군데서 투자자 그룹을 만날 정도로
강행군했다.
자일랜에 대한 투자자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루슨트테크놀로지 등 10년이나 앞서 있던 대기업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의 고유기술을 갖춘 자일랜에 대한 투자자들의 평가를 피부로 느끼는
순간이었다.
드디어 상장 첫날.
샌프란시스코와 뉴욕의 시차로 인해 샌프란시스코의 장외시장거래소는
3시간 일찍 문을 열게 돼 오전 6시부터 하루가 시작된다.
모건스탠리는 자일랜 주가를 26달러로 임시 책정하고 뉴욕에 등록하려
했는데, 샌프란시스코 현장에 도착해 보니 9시가 넘어서도 등록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불안한 마음은 잠깐.
생각보다 시장의 반응이 엄청나게 뜨거워 30달러를 훨씬 넘겨서 시작해도
될지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뉴욕과 샌프란시스코를 오가는 긴박한 컨퍼런스 콜이 계속되고, 주가는
계속해서 38달러 40달러 42달러...
끝을 모르고 올라갔다.
시작도 하기 전에 열기가 먼저 뉴욕에서부터 밀려오는 느낌이었다.
그런 긴박감이 1~2시간 흘렀을까.
드디어 나스닥에서 주가가 등록이 되고 컴퓨터 라인을 따라 샌프란시스코로
눈 깜짝할 사이에 전송돼 왔다.
52달러!
정말 믿기 어려운 순간이었다.
뒤이어 수백만 주에 이르는 엄청난 주문이 뒤따르고, 뉴욕 증시사상 네번째
로 높은 주가상승률을 보였다는 환호성이 터졌다.
종가는 58달러.
하룻동안에만 2억8천만달러를 벌어들였다는 실감나지 않는 소식이 여기
저기서 번져 갔다.
그리고 2년 뒤인 지난 3월 프랑스 알카텔사에 20억달러를 받고 자일랜을
매각하는 계약이 체결됐다.
스티브는 매각조건에 따라 2년간 경영을 맡기로 했다.
<> 성공한 벤처기업가에서 투자금융가로의 변신 =지난 3월 알카텔사에
자일랜을 20억달러에 매각한 뒤에는 벤처투자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마침 IMF사태로 고통받는 모국을 위해 무언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때 접하게 된 인물이 와이즈디베이스의 김태한 사장이다.
김 사장은 한국의 경제상황을 제대로 알려줄 컨설팅 파트너로 적격이라고
판단했다.
한국의 금융기관중 가능성 있는 기관을 찾아 국제경쟁력을 키우자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내일창투라는 신생회사가 눈에 들어 왔다.
지난해 11월 설립한 내일창투는 자본금의 45%를 투자하면서 올 상반기에만
19억원을 웃도는 순이익을 내는 등 좋은 실적을 내고 있었다.
결단을 내렸다.
한국의 벤처를 키우는 디딤돌로 내일창투를 선택했다.
와이즈-내일 인베스트먼트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 정리 = 오광진 기자 kjoh@ >
-----------------------------------------------------------------------
<> 55년 5월22일 서울 출생
<> 77년 덕성여대 가정학과 졸업
<> 77년 도미
<> 82년 미국 시민권 취득
<> 84년 파이버먹스 설립
<> 91년 파이버먹스 미국 ADC사에 매각
<> 93년 자일랜 설립
<> 96년 자일랜 나스닥 상장
<> 98년 보건복지부 장관상 수상(사회사업 관련)
<> 99년 자일랜 프랑스 알카텔사에 매각
<> 99년 와이즈-내일 인베스트먼트 투자심의위원회장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9월 3일자 ).
이 회사를 키운 "자일랜 신화"의 주역 김정실(47)씨가 한국의 벤처캐피털
시장에 진출했다.
창업 6년만에 기업가치를 2백배로 키운 김씨가 한국의 벤처기업을 키우겠다
며 창업투자사 와이즈-내일 인베스트먼트에 1천만달러를 투자한 것.
와이즈-내일의 출범기념식에 참석하기 위해 내한한 그는 성공스토리를
한국경제신문에 공개했다.
<> 미국에 도착한 뒤 =서강대 전자공학과 출신의 스티브 김(한국명 김윤종)
과 결혼, 76년에 도미했다.
스티브는 낮에는 창고에서 짐을 나르고, 밤에는 캘리포니아 주립대학원에서
전자공학을 전공하며 미국 생활에 적응해갔다.
유학생의 내조자로서 모든 것이 어려웠던 시절이다.
석사과정을 끝낸 스티브는 세일로 등의 방위산업체 통신장비 디자이너로
취직했다.
연봉 6만~7만달러의 안정된 샐러리맨 생활이 시작됐다.
그러나 스티브는 꽉 막힌 조직 운영 방식에 좌절하기 시작했다.
중소기업으로 자리를 옮겨 2년여쯤 광섬유를 이용한 통신시스템 개발에
매달리더니 자신의 회사를 직접경영하고 싶다는 뜻을 의논해 왔다.
벤처기업가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스티브의 나이도 벌써 서른 다섯.
두 아이의 가장으로 우리 가족이 안정적인 샐러리맨의 자리를 털어 버리고
새로운 모험을 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한국에 있는 가족 등 주위에서의 반대가 컸지만 일단 결심하고 나자 스티브
와 나는 면밀히 사업계획을 점검했다.
기술은 무엇보다 자신이 있었다.
컴퓨터를 이용한 통신망 분야는 폭발적인 성장을 예고하고 있었다.
당시로는 최첨단 기술이라고 할수 있는 광섬유를 이용한 데이터 통신시스템
에 대한 확실한 기술을 축적해 놓고 있던 터였다.
<> 차고에서 창업 =지난 84년 스티브와 함께 그동안 계를 통해 모은 돈과
저축한 돈을 합해 1만달러를 창업자금으로 모았다.
몇몇 친구들의 격려와 도움 속에서 집 근처 차고를 빌려 파이버먹스
(Fibermux)라는 광역통신망(WAN) 장비업체를 설립했다.
제품개발은 스티브의 몫으로 떨어졌다.
하루 24시간이 모자랄 정도로 제품 연구에 매달리는 숨가쁜 생활이 시작
됐다.
그러나 기업경영의 현실에서 가장 먼저 발목을 잡는 것은 자금이었다.
미국 비즈니스 관행을 모르고 처음으로 기업경영을 시작한 우리로서는 모든
것이 넘을 수 없는 높은 벽으로 다가 왔다.
허리띠를 졸라매고, 생활비를 줄이는 일부터 그때 그때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는 일까지, 개발이 끝나면 자금이, 자금이 마련되면 마케팅이, 마케팅
문제에 허덕이다 보면, 인력관리 문제가 끝없이 부딪쳐 왔다.
세금 경리 법률 등.
비용을 아끼고, 투자자들을 만나 자금을 모으고, 기약 없는 벤처기업에
투자한 친구들을 안심시키고, 회계나 인원관리 등 일상적인 업무는 내가
직접 나서서 해결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의 경험이 나중에 자일랜을 설립하는 소중한 밑거름이 됐다.
1년 반의 연구 끝에 파이버먹스 이름으로 광섬유를 이용한 데이터통신
시스템을 개발했다.
광섬유를 이용한 데이터 통신시스템이 바로 그것.
파이버먹스는 이 시스템의 성능을 인정받으면서 성장을 거듭했고, 설립
첫해 80만달러의 매출을 올렸다.
<> 내친김에 나스닥까지 =파이버먹스는 미국해군성과 항공우주국(NASA)에
납품하는 등 기술력을 인정받았다.
91년엔 나스닥 상장을 검토할 정도로 자리를 잡았다.
나스닥 상장이라는 어메리칸 드림을 실현할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이었다.
그러나 나스닥 상장은 기술력있는 제품을 개발해서 시장에 내다 파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기업의 영업력과 기술력을 미래가치와 함께 상장하는 일이다.
기업의 비전을 만들고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자신만의 미래가치를 만들어
가는 진짜 기업경영이 요구됐던 것이다.
초기에 혼자 끙끙 앓아가며 문제를 해결해 왔던 경험이 하도 절실해 사업이
본 궤도에 오르자마자 훌륭한 인재를 찾고 관리하는데 온갖 정성을 기울였다.
구멍가게든 초대형 기업이든 경영자가 최종 판단을 내리고 기업의 사업방향
을 설정하게 되지만, 이런 계획을 다듬고 실무영역에서 실수가 없도록 하는
일은 전문 경영인들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 작전상 후퇴 =나스닥 상장을 포기하고 더 큰 꿈을 위해 매각 제의가
들어와 있었던 ADC사에 파이버먹스를 매각키로 결정했다.
매각 대금은 5천4백만달러.
투자자들에게 이미 20배 이상의 이익을 돌려 주었다.
우리 역시 85년 파이버먹스 설립 이후 겪어 왔던 고생을 충분히 보상받고
남을 정도로 큰 수익을 올렸다.
스티브는 ADC에 2년간 계약직 경영인으로 묶이게 됐다.
미국 사회는 단순히 회사를 사들이는게 아니라 인력을 사들인다는 개념이
철저한 나라였다.
<> 자일랜 태동 =ADC와의 계약기간이 끝날 무렵, 이미 통신장비의 흐름이
바뀌고 있음을 간파하고 있던 우리는 더 이상 머뭇거릴 시간이 없음을 알고
있었다.
인터넷 시대가 빠른 속도로 열리고 있었다.
기업경영에도 어느 정도 자신이 생겼다.
파이버먹스 시절 동고동락하며 회사를 함께 이끌었던 유리 피코버를 투자
파트너겸 제2인자로 선임했다.
또 6명의 인재를 모아 자일랜을 설립하고 제2의 창업에 나섰다.
유리 피코버는 15세때 이민 온 러시아계 미국인으로 천재적인 세일즈맨이다.
자일랜을 설립한 우리는 정말 자신만만하고 신나는 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기존의 재래식 장비를 갖고 있던 대형업체들은 고작해야 합병(M&A)을 통해
기술을 확보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대형업체들은 시대조류를 민첩하게 타기엔 너무 큰 공룡이었고, 독자적인
기술을 갖고 있는 우리를 당하기엔 축적된 기술이 없었던 것이다.
<> 시련과 기회 =하지만 세상일은 뜻대로만 되는건 아닌 모양이다.
파이버먹스사를 매입했던 ADC사가 소송을 걸어 왔다.
유사업종에서 유사제품을 만들지 않겠다는 ADC사와의 계약을 어겼다는
것이다.
한시가 급하고, 아까운 순간에 길고 지루한 미국식 소송에 걸려 들고 만
것이다.
끝없는 소환과 변론작성, 미래를 알 수 없는 불안감.
모든걸 하루아침에 잃어 버릴 위기에 처했다.
천문학적인 손해배상금을 요구해 오는 대기업을 상대로 미국식 소송을
감당할 자신이 정말 없었다.
몇달간 스티브는 법원으로 불려 다니면서 힘겨운 과정을 겪었다.
기술 개발은 고사하고 벤처기업가로서의 꿈마저 포기하고 직장생활로 다시
돌아갈까 고민할 정도로 스티브는 탈진상태에 빠졌다.
그러나 인터넷 물결은 밀려오고 있었다.
파이버먹스의 성공도 ADC사의 예민한 반응도 이를 반증해주는 충분한 증거
였다.
스티브를 설득했다.
"이 고비만 넘깁시다. 충분히 성공할 수 있어요"
스티브가 법원으로 불려 다니는 동안 나와 동료들은 그동안 파이버먹스사를
운영하며 쌓아 놓은 투자인맥과 마케팅 네트워크를 총동원해 자일랜의
기틀을 닦는 작업을 진행했다.
다행히 소송이 장기전으로 진행되면서 자일랜에서 생산되는 제품이 ADC
제품과는 다르다는 것을 입증시켰다.
향후에도 유사한 제품은 만들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는 선에서 ADC와의
문제는 해결됐다.
소송문제가 해결되자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됐다.
94년초 브란트우드라는 벤처캐피탈의 자금 1천만달러가 자일랜에 투자됐고,
알카텔사의 투자가 이어지면서, 2년 동안의 철저한 연구개발이 시작됐다.
스티브와 나는 유능한 인재에 돈을 아끼지 않았다.
CIO(정보담당 최고경영자) CFO(재무담당 최고경영자) 등 미국식 특유의
전문 경영인들을 VP(Vice President)로 스카우트했다.
상장을 위해 하버드법대 출신의 한국계 변호사와 한국계 공인회계사(CPA)를
영입했다.
좋은 인재를 선별할 수 있는 안목과 이들 훌륭한 인재들이 최고의 기량을
발휘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이야말로 사업을 성공으로 이끄는
평범한 진리였던 것이다.
직원들과의 공동체의식도 중시했다.
주중은 물론 주말에도 회사에서 한사람이라도 일을 하는 한 항상 점심,
저녁을 제공했다.
시간에 쫓기는 이유도 있었지만 같은 배를 탄 공동운명체라는 의식을 심어
주고 싶었다.
결과는 만족스러웠다.
스톡옵션을 제시했기 때문에 직원들 모두 자기 회사라는 생각을 갖고
열심히 일해 주었다.
3개월에 한번씩 전직원을 강당에 모아놓고 회사의 경영상태를 공개했다.
본사 이외의 직원들과는 전화회의를 통해서라도 직원들이 최고경영자와
같은 정보를 가지고, 같은 목표를 가질 수 있도록 했다.
96년에는 타임지 선정 100대 초고속 성장기업 1위를 차지할 정도로 성공
가도를 달리기 시작했다.
<> 상장 게임 돌입 =주간사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모건 스탠리를 선정했다.
법률팀은 자일랜사의 고문 변호사였던 한국계 남태희 변호사가 맡았고,
회계부문은 피트 마릭스(Peat Marwick) 회계법인이 담당케 했다.
IPO를 담당했던 전문가들을 보면서 정말로 나는 많은 존경심을 가졌다.
30대 젊은 그룹으로 구성된 이들은 지칠줄 모르는 정열과 확신을 갖고
각자의 분야를 책임지며 상장 게임을 펼쳤다.
상장 게임은 긴박하게 전개됐다.
모건스탠리팀은 상장날짜를 잡아 놓고 미국 전역을 도는 투자자 유치
전략을 폈다.
미국은 넓은 나라였다.
구석구석 우리에게 관심을 가져줄 만한 투자자들을 한사람이라도 건지기
위해 전세 비행기를 동원, 하루에 6~7군데서 투자자 그룹을 만날 정도로
강행군했다.
자일랜에 대한 투자자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루슨트테크놀로지 등 10년이나 앞서 있던 대기업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의 고유기술을 갖춘 자일랜에 대한 투자자들의 평가를 피부로 느끼는
순간이었다.
드디어 상장 첫날.
샌프란시스코와 뉴욕의 시차로 인해 샌프란시스코의 장외시장거래소는
3시간 일찍 문을 열게 돼 오전 6시부터 하루가 시작된다.
모건스탠리는 자일랜 주가를 26달러로 임시 책정하고 뉴욕에 등록하려
했는데, 샌프란시스코 현장에 도착해 보니 9시가 넘어서도 등록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불안한 마음은 잠깐.
생각보다 시장의 반응이 엄청나게 뜨거워 30달러를 훨씬 넘겨서 시작해도
될지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뉴욕과 샌프란시스코를 오가는 긴박한 컨퍼런스 콜이 계속되고, 주가는
계속해서 38달러 40달러 42달러...
끝을 모르고 올라갔다.
시작도 하기 전에 열기가 먼저 뉴욕에서부터 밀려오는 느낌이었다.
그런 긴박감이 1~2시간 흘렀을까.
드디어 나스닥에서 주가가 등록이 되고 컴퓨터 라인을 따라 샌프란시스코로
눈 깜짝할 사이에 전송돼 왔다.
52달러!
정말 믿기 어려운 순간이었다.
뒤이어 수백만 주에 이르는 엄청난 주문이 뒤따르고, 뉴욕 증시사상 네번째
로 높은 주가상승률을 보였다는 환호성이 터졌다.
종가는 58달러.
하룻동안에만 2억8천만달러를 벌어들였다는 실감나지 않는 소식이 여기
저기서 번져 갔다.
그리고 2년 뒤인 지난 3월 프랑스 알카텔사에 20억달러를 받고 자일랜을
매각하는 계약이 체결됐다.
스티브는 매각조건에 따라 2년간 경영을 맡기로 했다.
<> 성공한 벤처기업가에서 투자금융가로의 변신 =지난 3월 알카텔사에
자일랜을 20억달러에 매각한 뒤에는 벤처투자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마침 IMF사태로 고통받는 모국을 위해 무언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때 접하게 된 인물이 와이즈디베이스의 김태한 사장이다.
김 사장은 한국의 경제상황을 제대로 알려줄 컨설팅 파트너로 적격이라고
판단했다.
한국의 금융기관중 가능성 있는 기관을 찾아 국제경쟁력을 키우자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내일창투라는 신생회사가 눈에 들어 왔다.
지난해 11월 설립한 내일창투는 자본금의 45%를 투자하면서 올 상반기에만
19억원을 웃도는 순이익을 내는 등 좋은 실적을 내고 있었다.
결단을 내렸다.
한국의 벤처를 키우는 디딤돌로 내일창투를 선택했다.
와이즈-내일 인베스트먼트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 정리 = 오광진 기자 kjoh@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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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5년 5월22일 서울 출생
<> 77년 덕성여대 가정학과 졸업
<> 77년 도미
<> 82년 미국 시민권 취득
<> 84년 파이버먹스 설립
<> 91년 파이버먹스 미국 ADC사에 매각
<> 93년 자일랜 설립
<> 96년 자일랜 나스닥 상장
<> 98년 보건복지부 장관상 수상(사회사업 관련)
<> 99년 자일랜 프랑스 알카텔사에 매각
<> 99년 와이즈-내일 인베스트먼트 투자심의위원회장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9월 3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