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진수 < 숙명여대 교수 / 경제학 >

얼마전 어느 미국계 펀드의 아시아 지사장을 만났다.

그 사람은 자신이 아는 펀드매니저들 가운데 대학 학부에서 역사학 철학을
전공한 친구들에 관한 칭찬을 늘어놓았다.

소위 "잘 나간다"는 모 대학의 경영학과 교수는 조만간 휴직을 하고 역사를
공부하러 유럽으로 갈 예정이라고 한다.

특정학과를 지명해서 안됐지만 역사학 철학하면 우리나라 거의 모든 대학에
서 잘못하면 학과가 없어질 정도로 인기가 없다.

반대로 학과이름에 "정보"나 "전산"자가 들어가는 과, 법이나 경영과 관련된
과, 언론과 관련된 과들은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인기학과로만 몰리고 있다는 말이다.

왜 누구는 그 학문이 필요해서 휴직을 하면서까지 공부하려고 하는데,
대학에 들어오는 학생들은 왜 철저하게 그와 같은 비인기학과를 외면하는
것일까.

그것은 우리사회가 닫혀있기 때문이다.

초등학교때부터 엄마의 치맛바람에 맞춰 학원을 열심히 다녀야만 그나마
괜찮은 대학에 갈수 있다고들 한다.

중학교때부터 시작하면 늦다는 것이다.

나중에 다른 기회가 주어지지 않으므로 대학입시에서는 적성과 상관없이
당장 좋아 보이는 학과를 무조건 택하게 돼있다.

인기는 없지만 자신이 좋아하는 학문을 전공하다가는 나중에 길을 바꾸고
싶어도 사회가 그것을 쉽게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다.

일단 모 대학 모 학과에 입학하면 대학원에 가더라도 같은 대학 같은 과가
아니면 잘 받아주지 않는다.

받아주더라도 "찬밥 신세"가 될것이 뻔하다.

취직도 마찬가지다.

한번 취직하면 다른 기회가 좀처럼 주어지지 않으므로 일단 좋고 큰 회사에
입사하려 한다.

능력있는 사람이 아니라 "짬밥"이 많은 사람이 대접받는 회사문화에서 모든
사람은 한눈을 팔 여유도 없이 일단 좋은 직장에서 자리잡고자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공무원도 젊어서 행정고시에 합격해야만 고위직을 바라볼 수 있다.

대학교수를 뽑을 때에도 타대학 출신은 물론 같은 대학 출신이라도 학부
전공이 다르면 채용을 꺼리고 있다.

나이가 40이 넘으면 그것도 안 된다고 한다.

인생의 길이 너무 젊어서 정해지고 그 길을 바꾸기 또한 참으로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우리의 닫혀있는 모습인 것이다.

위로 오를 수는 있어도 옆으로 움직이지는 못하는 갑갑한 사회, 닫힌
사회에서는 모든 사람이 같은 길을 가고자 하게 마련이다.

일류학원에 다니고, 일류대학 일류학과를 졸업해서 일류직장에 취직하고자
하는 다 똑같은 사람들을 우리 사회는 만들고 있는 것이다.

좁은 시야를 가진, 판에 박힌 우물안 개구리들 말이다.

반대로 일찌감치 일류의 대열에 오르지 못한 사람에게 제2,제3의 기회가
없으니 희망이 있을 리가 없고 인생이 즐거울 리도 없다.

사회가 닫혀 있으면 마음도 닫혀 있기 쉽다.

나중에라도 갈 수 있으면 내가 나오지 않은 대학도 친근하게 느껴질텐데,
기회가 막혀 있으면 남의 대학처럼 인식되게 마련이다.

다른 학문도 언제든지 전공할 수 있으면 조금이나마 관심을 가져 볼텐데,
기회가 막혀 있으면 관심을 가질 이유도 없다.

나도 가서 살면 그 지역 사람이 될 수 있어야 다른 지역사람들도 친근하게
느껴질텐데, 태생을 따지고 출신고교를 따짐으로써 기회를 원천적으로 막으면
남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똑같은 길을 가려고 하지 않고, 또 다양한 경험을 그것도
젊어서 해보기 위해서는 열린 사회가 돼야만 가능하다.

제2, 제3의 기회가 모든 사람 앞에 놓여 있어야만 여러가지를 시도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도 또다시 기회가 있어야만 남들이 좋다는 길 대신에 자신이 가고
싶은 길을 한번 가볼까 하는 생각을 가질 수 있으리라.

대학을 안 간 사람도 언제든지 대학을 갈 수 있고, 인기 학과를 안 간
사람도 나중에 학과를 옮길 수 있고, 일류대학을 안 나온 사람도 대학원은
일류대학원으로 갈 수 있고, 좋은 회사에 취직하지 않았더라도 나중에
실력을 인정받으면 회사를 옮길 수도 있고, 행정고시를 안 보아도 고위직
공무원이 될 수 있고, 이혼이 좋은 것은 아니지만 재혼의 기회가 주어지는
그런 사회가 열린 사회인 것이다.

한눈을 조금 팔아보기도 하고 이것저것 하고 싶은 일들도 다 해봄으로써
성숙해진 다음에 자신의 길을 선택할 여유가 주어지고, 그 길 또한 언제든지
바꿀수 있는 그런 사회가 내 후손들이 살았으면 하는 열린 사회인 것이다.

< jsyoo@sookmyung.ac.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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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 약력

=<>서울대 경제학과
<>미국 UC버클리대 경제학박사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연구위원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8월 27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