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입삼 회고록 '시장경제와 기업가 정신'] (56) '새회장..'
-
기사 스크랩
-
공유
-
댓글
-
클린뷰
-
프린트
[ 새 회장단 선출 추진 ]
"전환기에 선 한국경제 진로"의 첫항은 이렇게 시작한다.
"앞으로 3~4년내에 연간 적어도 4억불의 외화획득을 국민적 분발목표로
천명하고 정부시책 기업활동 사회노력 등이 이에 총 집결되기를 촉구한다"
이어지는 2항은 "정부는 종래의 지나친 관료중심의 시책 태도를 지양함과
아울러 자유경제 원칙에 따른 기업의욕의 강인성을 명기하여 이를 조장하고
소신있는 정책명시와 일관된 집행으로 국민에게 심리적 안도감을 부여하도록
강력히 요청한다"고 명시돼 있다.
놀랍게도 외환위기를 맞은 요즘 사태를 해결하는데 그대로 적용해도 될 법한
내용과 표현이다.
건의서는 결론적으로 "제1차 5개년 계획"을 "수출산업 진흥계획"으로
대체할 것을 대담하게 제안했다.
물론 전택보, 이병철 회장 등 경제계 지도자들과 여러차례 의견을 교환한
끝에 얻은 결론이었다.
건의서가 발표되자 신문들은 기다렸다는 듯 "한국경제의 진로" 내용을
대서 특필하고 기획기사로 다뤘다.
이후 대부분의 신문이 "5개년계획 대폭수정"을 공개적으로 거론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수출만이 살길"이라는 국민적 공감대(콘센서스)가 급속히 형성
됐다.
그러나 외환 사정은 여전히 다급했다.
정부는 63~65년까지 "대일 청산계정"에서 연말이면 생기는 불과 2~3천만달러
의 적자를 메우는데 쩔쩔맬 정도였다.
무엇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정부는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허둥댔다.
"경제인협회 제안"을 받아 들일 여유도 없었다.
한마디로 정부는 물론 국민들은 "붕 뜬 상태"였다.
64년 초 새정부가 들어선 직후 경제인협회에서도 회장단으로 새로 뽑아 산뜻
하게 출발하자는 의견이 대두됐다.
원래 회장단 선출은 연초 정기총회에서 해야 하는데 5.16 이후 7, 8월께로
바뀌었다.
그러나 경제인협회 총회는 사업계획, 예산편성 등 어느 모로 보나 회원사
주총시기와 때를 맞춘 연초에 하는 것이 순리였다.
일부에서 지난번 총회는 7월에 했지만 이번에는 4월로 앞당기자는 의견을
냈다.
이정림 회장도 이같은 제안에 적극 호응했다.
이 회장은 건강 문제도 있고 사업(시멘트)도 더욱 확대할 마음에서 하루라도
빨리 회장직을 물러나고 싶어했다.
때문에 이 회장 임기를 줄이는데는 별 문제가 없었다.
이사회는 이 회장 제의를 받아들여 회장단 선출 총회를 4월17일로 정했다.
문제는 누구를 회장으로 선출할 것인가였다.
회원사의 전반적 의견은 분열상태에 있는 협회를 단합시킬 수 있는 분이라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구동성으로 경방 김용완 사장이 거론된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그런데 윤태엽 부장은 "본인이 아시면 펄펄 뛸 것"이라며 걱정했다.
김용완 사장이 회원사로부터 폭넓은 지지를 얻는데는 몇가지 이유가 있었다.
무엇보다 경방은 면직 업종이었지만 선각자적 민족기업으로 당시로서는
기간산업에 속했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먼저 설립된 공개주식회사였으며 김 사장은 산업화의
선구자였던 셈이었다.
뿐만 아니라 김영수 한국경제협의회 초대회장(삼영사 회장)의 후계자로
주목 받고 있었다.
더욱이 김사장의 "선공후사", 다시말해 사심없는 일 처리는 정평이 나 있을
정도였다.
공을 앞세우고 사를 뒤로하는 철학은 스승이자 처남인 인촌 김성수 선생으로
부터 배운 것이다.
이런 일화가 기억난다.
50년대초 한국동란 직후였다.
미국 원조 물자를 취급하기 위해 방적업계는 "한국방적협회"를 조직하고
김용완 사장을 이사장으로 선출했다.
당시는 물자 부족에 고인플레이션 시기라 원면을 많이 확보하는게 그만큼
수익을 올리는 길이었다.
자연히 방협 이사회에서는 원면 배정을 놓고 고성이 오갔다.
조금이라도 원면을 많이 차지하기 위해서엿다.
원면 배정기준은 소유 방적 추수에 따르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런데 하루는 신참 회원이 이에 의의를 제기했다.
"기존 소유 추수에 따라 원면을 배정하면 새로 생긴 회사는 영원히 성장할
수 없다"는 주장을 끈질기게 폈다.
좀체 타협을 보지 못하자 김용완 이사장은 "정 그러면 경방에 배정된 원면
일부를 신참 회원사에 넘기겠다"고 양보안을 내놓았다.
이때 경방을 대표해 회의에 참석한 장세형 상무가 반론을 제기한다.
"김 이사장은 방적협회 이사장일 뿐 이 자리에서 경방을 대표할 수 없다"며
김 이사장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을 보였다.
최근에도 김각중 현 경방회장(김용완 회장 장남)은 이 일을 회상하면서
"선친이 이렇게 욕심이 없었으니 경방이 클 수 있었겠는가..."며 씁쓸한
표정을 짓던 일이 기억난다.
이런 성격의 김용완 사장은 이해 관계가 얼키고 설킨 경제인협회를
이끌어가는데 둘도 없는 적임자라고 회원들 모두가 생각했다.
후일담이지만 필자는 김용완 회장을 근 14년간 모시고 일하면서 부지불식간
에 사고의 구석구석까지 영향을 받았다.
지금도 필자가 믿고 있는 것은 "지도자란 무엇보다 사심이 없어야 한다"는
지도자론이다.
지도자의 제일 덕목은 무사심.
사심 있는 지도자는 아무리 지식과 역량이 뛰어나도 언젠가는 사심으로 인해
약점이 드러나게 마련이다.
사심이 없다는 것은 "정직"과 상통한다는 것을 나는 인간 김용완에게서
발견했다.
이분 만큼 어린애처럼 천진난만하고 정직한 분을 나는 아직 못 봤다.
문제는 이 분을 어떻게 회장으로 모실 수 있을까에 있었다.
김 회장은 선거로 당선돼도 이를 수락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 선거한다는 것은 언제나 내분과 외풍이 끼여들 짬을 제공하는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선거없이 추대식 회장 선출 방법을 윤태엽 부장과 머리를
맞대고 궁리했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6월 28일자 ).
"전환기에 선 한국경제 진로"의 첫항은 이렇게 시작한다.
"앞으로 3~4년내에 연간 적어도 4억불의 외화획득을 국민적 분발목표로
천명하고 정부시책 기업활동 사회노력 등이 이에 총 집결되기를 촉구한다"
이어지는 2항은 "정부는 종래의 지나친 관료중심의 시책 태도를 지양함과
아울러 자유경제 원칙에 따른 기업의욕의 강인성을 명기하여 이를 조장하고
소신있는 정책명시와 일관된 집행으로 국민에게 심리적 안도감을 부여하도록
강력히 요청한다"고 명시돼 있다.
놀랍게도 외환위기를 맞은 요즘 사태를 해결하는데 그대로 적용해도 될 법한
내용과 표현이다.
건의서는 결론적으로 "제1차 5개년 계획"을 "수출산업 진흥계획"으로
대체할 것을 대담하게 제안했다.
물론 전택보, 이병철 회장 등 경제계 지도자들과 여러차례 의견을 교환한
끝에 얻은 결론이었다.
건의서가 발표되자 신문들은 기다렸다는 듯 "한국경제의 진로" 내용을
대서 특필하고 기획기사로 다뤘다.
이후 대부분의 신문이 "5개년계획 대폭수정"을 공개적으로 거론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수출만이 살길"이라는 국민적 공감대(콘센서스)가 급속히 형성
됐다.
그러나 외환 사정은 여전히 다급했다.
정부는 63~65년까지 "대일 청산계정"에서 연말이면 생기는 불과 2~3천만달러
의 적자를 메우는데 쩔쩔맬 정도였다.
무엇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정부는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허둥댔다.
"경제인협회 제안"을 받아 들일 여유도 없었다.
한마디로 정부는 물론 국민들은 "붕 뜬 상태"였다.
64년 초 새정부가 들어선 직후 경제인협회에서도 회장단으로 새로 뽑아 산뜻
하게 출발하자는 의견이 대두됐다.
원래 회장단 선출은 연초 정기총회에서 해야 하는데 5.16 이후 7, 8월께로
바뀌었다.
그러나 경제인협회 총회는 사업계획, 예산편성 등 어느 모로 보나 회원사
주총시기와 때를 맞춘 연초에 하는 것이 순리였다.
일부에서 지난번 총회는 7월에 했지만 이번에는 4월로 앞당기자는 의견을
냈다.
이정림 회장도 이같은 제안에 적극 호응했다.
이 회장은 건강 문제도 있고 사업(시멘트)도 더욱 확대할 마음에서 하루라도
빨리 회장직을 물러나고 싶어했다.
때문에 이 회장 임기를 줄이는데는 별 문제가 없었다.
이사회는 이 회장 제의를 받아들여 회장단 선출 총회를 4월17일로 정했다.
문제는 누구를 회장으로 선출할 것인가였다.
회원사의 전반적 의견은 분열상태에 있는 협회를 단합시킬 수 있는 분이라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구동성으로 경방 김용완 사장이 거론된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그런데 윤태엽 부장은 "본인이 아시면 펄펄 뛸 것"이라며 걱정했다.
김용완 사장이 회원사로부터 폭넓은 지지를 얻는데는 몇가지 이유가 있었다.
무엇보다 경방은 면직 업종이었지만 선각자적 민족기업으로 당시로서는
기간산업에 속했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먼저 설립된 공개주식회사였으며 김 사장은 산업화의
선구자였던 셈이었다.
뿐만 아니라 김영수 한국경제협의회 초대회장(삼영사 회장)의 후계자로
주목 받고 있었다.
더욱이 김사장의 "선공후사", 다시말해 사심없는 일 처리는 정평이 나 있을
정도였다.
공을 앞세우고 사를 뒤로하는 철학은 스승이자 처남인 인촌 김성수 선생으로
부터 배운 것이다.
이런 일화가 기억난다.
50년대초 한국동란 직후였다.
미국 원조 물자를 취급하기 위해 방적업계는 "한국방적협회"를 조직하고
김용완 사장을 이사장으로 선출했다.
당시는 물자 부족에 고인플레이션 시기라 원면을 많이 확보하는게 그만큼
수익을 올리는 길이었다.
자연히 방협 이사회에서는 원면 배정을 놓고 고성이 오갔다.
조금이라도 원면을 많이 차지하기 위해서엿다.
원면 배정기준은 소유 방적 추수에 따르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런데 하루는 신참 회원이 이에 의의를 제기했다.
"기존 소유 추수에 따라 원면을 배정하면 새로 생긴 회사는 영원히 성장할
수 없다"는 주장을 끈질기게 폈다.
좀체 타협을 보지 못하자 김용완 이사장은 "정 그러면 경방에 배정된 원면
일부를 신참 회원사에 넘기겠다"고 양보안을 내놓았다.
이때 경방을 대표해 회의에 참석한 장세형 상무가 반론을 제기한다.
"김 이사장은 방적협회 이사장일 뿐 이 자리에서 경방을 대표할 수 없다"며
김 이사장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을 보였다.
최근에도 김각중 현 경방회장(김용완 회장 장남)은 이 일을 회상하면서
"선친이 이렇게 욕심이 없었으니 경방이 클 수 있었겠는가..."며 씁쓸한
표정을 짓던 일이 기억난다.
이런 성격의 김용완 사장은 이해 관계가 얼키고 설킨 경제인협회를
이끌어가는데 둘도 없는 적임자라고 회원들 모두가 생각했다.
후일담이지만 필자는 김용완 회장을 근 14년간 모시고 일하면서 부지불식간
에 사고의 구석구석까지 영향을 받았다.
지금도 필자가 믿고 있는 것은 "지도자란 무엇보다 사심이 없어야 한다"는
지도자론이다.
지도자의 제일 덕목은 무사심.
사심 있는 지도자는 아무리 지식과 역량이 뛰어나도 언젠가는 사심으로 인해
약점이 드러나게 마련이다.
사심이 없다는 것은 "정직"과 상통한다는 것을 나는 인간 김용완에게서
발견했다.
이분 만큼 어린애처럼 천진난만하고 정직한 분을 나는 아직 못 봤다.
문제는 이 분을 어떻게 회장으로 모실 수 있을까에 있었다.
김 회장은 선거로 당선돼도 이를 수락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 선거한다는 것은 언제나 내분과 외풍이 끼여들 짬을 제공하는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선거없이 추대식 회장 선출 방법을 윤태엽 부장과 머리를
맞대고 궁리했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6월 28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