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실 < 한국경제연 연구위원 >

구조조정 이후 겉보기로 엄청나게 변한 산업 가운데 하나가 은행산업이다.

한국의 금융역사상 처음으로 은행문을 닫는 "퇴출"이 이루어지지 않았는가.

또 서로 다른 은행끼리 결합하여 새로운 은행으로 탄생하지 않았는가.

M&A와 P&A 방식에 의해 각각 5개씩 모두 10개의 은행이 간판을 내렸다.

구조조정 이후 직원수도 무려 34%나 줄어들었다.

물론 경제위기 이전에도 국내 은행산업의 합병에 대한 숱한 논란이 있었다.

적잖은 금융 전문가와 학자들은 국내 은행산업의 규모 및 범위의 경제에
대해 상반되는 연구 결과를 내놓곤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은행끼리 대대적인 합병이 이루어진 것은 정부가
구조조정의 한 방편으로 M&A를 적극 권장한 점도 일조를 하였다.

과거에는 은행끼리 자발적으로 합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문제는 1차적인 구조조정 과정에서 합병이 일어난 이후에도 국내 은행의
규모는 세계 대형은행에 비해 열세를 면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합병을 택한 국내 대형 은행의 경우 총자산 기준으로는 외국 대형은행의
5분의1 내지 7분의1에 불과하다.

자기자본 기준으로 보면 10분의1 수준밖에 되지 않는다.

이런 규모로는 외국의 거대한 금융기관과 맞붙어 덩치 싸움에서 밀릴 수밖에
없다.

다양한 금융상품을 자랑하며 선진금융기법을 구사하는 질적 경쟁에서는
더더구나 상대가 되지 않는다.

또 한국의 금융기관 대부분은 오랫동안 관치에 길들여져 자율적인 의사결정
능력을 사실상 상실하지 않았던가.

급변하는 국제금융환경에서 "생각의 속도"로 의사결정을 해야 이길 수 있지
않을까.

앞으로 한국에서 일부 대형 금융기관을 중심으로 국제적 수준에 상응하는
역량을 구축하기 위해 추가적인 M&A가 본격적으로 일어날 전망이다.

이것은 시대적 요청이기도 하다.

사실 지난 80년대 말과 90년대 초에 걸쳐 심각한 구조조정을 경험하였던
미국은행들의 경우에 비추어 볼 때 지난 1년 반에 걸친 한국의 은행
구조조정은 서막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

미국의 경우 지난 92년 1만1천4백65개에 달하던 은행 수가 현재는 9천여개를
약간 상회하고 있다.

2000년에는 8천개선으로 줄어들 것으로 보인다.

특히 상위 1백20개 은행은 2000년까지 15~20개로 대폭 줄어들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 은행의 경우 대형화는 일부 대형은행에 국한된 것으로
보인다.

앞으로 살아 남을 4~5개 대형은행간의 선도은행을 차지하기 위한 치열한
경쟁이 예상되는 가운데서도 틈새 시장을 파고 드는 전문 금융기관들과
지역당 한개 정도의 지역은행은 살아 남을 가능성이 크다.

제일은행에 대한 뉴브리지 캐피털과의 매각협상이 불투명하긴 하나 외국계
금융기관의 본격적인 등장으로 국내 금융산업에 적잖은 변화가 예상된다.

80년대 후반 경상수지 흑자로 자금잉여현상이 나타나기 전까지 국내 은행
산업내에서 외국계 은행의 중요한 역할은 외화자금을 공급해주는 것이었다.

90년대 들어서는 국내 자본시장 개방이 진행됨에 따라 선진 금융기법 전수
창구로서의 역할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지난 97년말 금융위기 이후 국내 금융시장의 문이 활짝 열리면서
외국계은행은 국내은행들의 본격적인 경쟁자로 등장하게 되었다.

저리의 자금조달 능력을 보유한 외국계 은행이 본격적으로 진출하게 되면
기업금융 가운데 상당부분은 외국계 은행이 경쟁우위를 보일 것이다.

문제는 소매금융인데 이미 소매금융업에 진출한 씨티은행의 경우 프라이빗
뱅킹 등 일부 분야에서 시장을 잠식하고 있으며 향후에는 다른 분야에서도
본격적인 시장잠식이 예상되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나라의 은행시장은 미국의 은행시장처럼 다양하지 못해 틈새시장의
영역은 매우 좁다.

그리고 규모의 경제를 이루어 외국은행과 경쟁하기에는 아직도 은행수가
많은 편이다.

따라서 외국계 은행이 국내시장에 본격적으로 진출하고 비은행기관들이
은행시장에 다양한 양상으로 침투하게 되면서 역량이 달리는 은행은 합병이나
폐쇄의 대상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이제 국내은행들은 국제금융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수준의 경쟁력을
갖출 것을 요구받고 있다.

이러한 과정에서 국내은행들의 사활은 어떻게 자율경영체제를 신속하게
구축하고 실천방안을 마련하는가에 달려있다.

< insill@keri.or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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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 약력 =<>연세대 경제학과 졸업
<>미국 미네소타대 경제학박사
<>미국 휴스턴대 교수
<>하나경제연구소 금융조사팀장
<>주요논문:금융실명제 실시 1년의 평가와 향후 과제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6월 22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