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범 < 경희대명예교수 / 국문학 >

일제시대 때 일본인들이 한국 명산의 정기를 끊기 위해 쇠말뚝을 박았다는
것은 다 아는 사실이다.

최근 전국 곳곳의 무덤에 쇠말뚝과 칼을 꽂는 일이 생겼다.

무덤에 쇠말뚝과 칼을 꽂는 것은 한마디로 그 무덤 주인공의 기를 끊겠다는
저주행위라 하겠다.

무속의 기본은 효사상이다.

조상들을 잘 섬김으로써 조상들의 은덕을 받자는 것이 기본사상이다.

무속인들은 죽은 조상의 혼령이 무속인에게 실려 예언도 하고 병도 치유할
수 있는 능력을 준다고 믿고 있다.

죽은 자의 영혼을 좋은 곳으로 보내기 위해 진오귀굿이나 씻김굿을 하기도
한다.

무속인들이 모시고 있는 신은 조상신만이 아니다.

수신 산신 천신등 자연신과 단군 이순신 김유신 강감찬 임경업 최영 장군
등을 모시기도 한다.

태조 이성계, 세종대왕, 명성왕후(민비) 등 왕족을 모시는 무속인도 있다.

고 박정희 대통령 부부를 모신 분도 있고 외국인인 맥아더 장군을 모시기도
한다.

모신 분들에게서 영험을 얻으려면 그분들을 정성껏 모시고 대접해야 한다.

굿을 하고 산에 가서 기도를 하며 맑고 영특한 영험을 지니게 해달라고
기원한다.

따라서 자기들이 모시는 신에게 쇠말뚝을 꽂고 칼을 꽂는다는 것은 전통적인
무속신앙으로 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면 어째서 무속인이 여러 곳에 그런 일을 저질렀을까.

두 가지 측면으로 생각할 수 있다.

첫째는 누가 시켜서 벌였을 가능성이다.

이 경우 원한관계나 정치적 관계 등을 생각할 수 있다.

특정 집안의 기를 끊겠다는 의도로 볼수 있다.

또 하나는 그 무속인의 정신적 도착현상을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제정신을 가진 무속인이라면 자신이 받들고 있던 임금님들에게 저주를 할
아무런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구리판에 생년월일과 이름을 써서 묻은 사례도 나왔다.

이 것은 쇠말뚝이나 칼을 꽂은 것과는 다르다.

만일 그 주인공이 무속인이나 역술가라면 임금님의 기를 받아 유명해지거나
영험해지기를 바라는 심리가 작용했을 것이다.

그 기를 구리판을 통해 받겠다는 의도다.

무속인이 아닐 경우엔 자신이 하는 일이 잘 되고 출세하고 싶은 욕망에서
임금님의 기를 빌겠다는 의도로 볼 수 있다.

이렇듯 무덤이나 산에 칼을 꽂는 것은 풍수사상을 지나치게 과신하는 데서
오는 현상이다.

과연 풍수사상이 어떤 효과가 있길래 그렇게 광신적일까.

실제로 집안에 시끄러운 일이 생겨 무꾸리(무당 판수 등 신령을 모시는
사람에게 길흉을 점치는 일)를 했더니 그럴듯한 사실이 발견된 경우가 적지
않다.

어떤 집은 무덤 안에 쇳조각이 있어 흉사가 그치지 않는다고 해 무덤을
파헤쳐 보았더니 무덤을 만들 때 썼던 삽이 부러져 들어가 있었다.

어떤 집에서는 죽은 이가 꿈에 나타나 답답하다며 옷을 벗겨 달라는 것이
었다.

파헤쳐 보았더니 염을 할 때 시체가 썩어 물이 흘러 비닐을 씌운 것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또 한 집은 장사를 지낸 뒤부터 할머니의 행동이 이상해 졌다.

앉는 것이나 먹는 것이나 걷는 것이나 종전과는 달리 약간 모로 꼬는
것이었다.

무꾸리를 했더니 관이 제자리에 놓이지 않아 그렇다는 것이다.

헤쳐 봤더니 관을 묻을 때 옆에 큰 바위가 있어 약간 비스듬히 놓은 것으로
확인됐다.

아무도 종을 치지 않았는데 종소리가 갑자기 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그 종을 만든 원료를 캐낸 광산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이런 현상을 "동기유감"이라고 한다.

쌍둥이 아이가 미국과 영국에 떨어져 있어도 같은 시간에 아프고 거의
비슷한 행동을 하는 것 등이 동기유감현상이다.

그러나 이같은 현상은 극히 드물게 나타난다.

묘자리나 조상의 혼령이 후손에게 영향을 준다는 것이 확대해석돼 비합리적
인 행동을 하게 만드는 것이다.

무덤의 영향을 받는 사람은 이른바 "신기" 또는 "무기"가 있는 사람들이다.

정신적으로 건강한 사람은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는다.

무덤에 쇠말뚝이나 칼을 꽂았다고 해서 그 후손이 저주를 받고 무력해질 수
있다는 것은 객관성이 없는 얘기다.

이런 현상이 최근들어 갑자기 나타나는 것은 시대적으로나 정치.경제적으로
사회가 불안한 데서 빚어지는 사회병리현상이라 하겠다.

< jbmseo@nms.kyunghee.ac.kr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5월 1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