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제인협회 담화문 ]

내가 한국일보 사장 이임사를 썼다면 많은 사람이 의아하게 생각할 것이다.

1963년 1월 27일로 기억된다.

여느날 처럼 온종일 물가대책회의에 매달려있었다.

피곤해 저녁도 안먹고 소파에서 잠깐 눈을 붙이고 있었다.

당시엔 사무국장실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회의실 한 모퉁이에 책상과 소파를 놓고 있을 뿐이었다.

전화벨이 울렸다.

시계를 쳐다보니 오후 8시가 다 돼가고 있었다.

한국일보 남궁련 사장(극동정유 창업주)이었다.

잠깐 만나자는 것이었다.

용건을 캐물으니 밑도 끝도 없이 내일 사장직을 퇴임하니 "퇴임사"를 좀
봐달라고 했다.

"내가 어떻게..."

"아니 그러지 말고, 몇 회원들에게 상의해보니 당신이 잘 쓸거라고 해서"

저녁을 먹는 둥 마는 둥 남궁련 사장집(현 일본대사관저자리)으로 갔다.

한평 반 가량 되는 온돌방에서 마주 앉았다.

"장기영씨(한국일보 창업주)가 내 퇴임사를 썼는데 마음에 안들어서 김국장
에게 부탁하는 것이오"

"아니 한국일보에 명문가들이 많을텐데..."

나는 거듭 난색을 표했다.

남궁 사장은 막무가내로 양면계지에 달필로 쓴 퇴임사 초안을 내 앞에 불쑥
내밀었다.

나는 단숨에 읽어 내려갔다.

"나도 이 초안이 마음에 안듭니다. 우선 회사 자랑이 너무 장황합니다.
자기 자랑이 많으면 독자는 역겨워합니다"

"그렇게 느껴져서 김국장에게 부탁하는 것이오"

그런데 이런 말을 주고 받는 사이에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잠깐 뒤를 돌아보니 바로 장기영씨가 어느 사이엔가 방에 들어와 앉아 있는
것이 아닌가.

아차 했으나 이미 지나간 일이었다.

이때 장기영씨는 유명한 "오보사건"으로 형무소에 갇혔다가 갓 석방된
상태였다.

사람이란 여건에 따라 저렇게 변모할 수 있을까.

당당한 풍모는 온데간데 없고 허술한 잠바차림에 그렇게 왜소해 보일 수가
없었다.

오보 사건의 사연은 이랬다.

61년 11월 28일 한국일보 조간은 장안의 독자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신당 사회노동당(가칭)으로"란 컷에 "정강정책 초안도 완료, 영국 노동당
것을 대체로 본 따" "근로대중 지지 획득과 통일에의 원대한 목표를 전제한
듯" 등 자극 만점의 타이틀을 달고 있었다(끊임없는 전진:장기영 일대기
1백63쪽).

이 기사로 최고회의와 내각은 발칵 뒤집혔다.

장기영 사장을 비롯한 관련자 전원이 구속됐고 신문은 5일간 정간 처분을
받았다.

위기에 처한 장 사장은 고심 끝에 친구인 남궁련씨에게 회사 운영 일체를
맡겼다.

그가 돌아오자 남궁 사장이 떠나게 된 것이다.

1963년 1월 28일 게재된 남궁련 사장 이임사의 한구절을 옮겨보자.

"그간 본인은 언론계에 생소함을 비롯한 온갖 사정을 무릅쓰고 오직 벗을
위한 의리와 신의를 북돋기 위해 이 중책을 감히 맡았던 것입니다. 장기영씨
에게 다시 발행중책을 맡기는 것이(...) 이 사회에 보다 기여할 수 있다고
생각되기에 본인은 이 자리를 가벼운 마음으로 물러나는 바입니다"

이 사건의 파장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당시 사회상황은 조그만 계기만
있어도 폭발할 수 있을 정도로 대단히 인화성이 강한 분위기였다.

별별 유언비어가 떠돌고 있었다.

한국일보 기사를 읽고 많은 사람들은 "그러면 그렇지 장난삼아 혁명을
일으켰을까"하는 반응을 보였다.

5.16 주체들의 정체, 노선에 그만큼 믿음이 덜 했던 것이다.

경제에 있어서는 더욱 그랬다.

5개년 계획에 "지도받은 자본주의"라고 공공연히 표기한 것처럼, 시장경제와
는 거리가 먼 통제방향으로 나가는 인상을 깊게하고 있었다.

그래선지 63년 1월~2월 경제인협회 "업무일지"에는 하루가 멀다하고 열린
경제기술센터(한국경제연구원 전신)의 자문위원과 경제인들의 연석회의
기록이 담겨있다.

특히 1월31일에는 박정희 의장과의 면담을 앞두고 자문위원들과 숙의를
거친 담화문이 발표됐다.

지금 읽어봐도 예리하고 현실 분석에다 솔직 대담한 대책 제시라고 생각
된다.

내용을 보자.

당면한 경제난맥상의 주 요인으로 꼽은 것은 다섯가지다.

1)정부의 "조령모개"식 정책 급변 2)백해무익했던 통화개혁 3)담배값과
전기료 등 공공요금 대폭 인상 4)외화고갈에 따른 지나친 수입억제로 인한
수입원자재가격 폭등 5)민정이양 과정에서의 한미간 마찰과 이로 인한 원조
지연 등이다.

이런 요인들 때문에 경제는 방향을 잃고, 민심 또한 말이 아니라고 조목조목
지적하고 있다.

경제인들의 지적은 현실에 바탕한 것이었다.

오죽했으면 박정희 의장 자신도 갓 시작한 5개년계획을 일부 수정해서라도
식량도입에 자원을 추가 투입하라는 특명을 내릴 정도였을까.

바로 전해인 62년은 흉년이어서 식량부족 현상마저 나타나고 있었다.

단순히 지적에만 그친 것도 아니었다.

경제인협회 소속 민간 경제인들과 자문위원들은 두 가지 중요한 제안을
했다.

우선 정부정책 수립에 투명성을 기할 것을 요청했다.

정책 실패의 주원인이 군대 운영체질에서 연유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시정
하라는 주문이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군사정부 각료들은 정책을 군대의 "일급, 이급 비밀"식으로
어둡게 처리했다.

경제인협회는 여기에 덧붙여 "공업화-수출제일주의"를 강조했다.

정부가 국제협력에 의한 공업화와 수출제일주의를 구현하는 것이 경제발전의
요체임을 천명하고 이를 위해 관과 민이 서로 신뢰.합심할 수 있는 분위기를
하루 빨리 조성할 것을 제안한 것이다.

나는 이런 소용돌이 속에서도 수출만이 살길이라고 굳게 믿고, "수출산업
촉진 특명위원회" 준비에 본격적으로 착수했다.

< 전 전경련 상임부회장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4월 12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