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패션계는 천년의 끝과 시작 사이에 있다는 혼란 때문인지 유례없이
다양한 스타일들이 공존하고 있다.

자연을 닮은 내추럴리즘과 화려한 로맨틱 무드, 전위적인 아방가르드룩
뿐 아니라 90년대를 주도했던 미니멀리즘이나 60.70년대 히피풍도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특이한 것은 이처럼 혼란스러워 보이는 트렌드들 사이에서 공통적인 또
하나의 유행요소를 찾을 수 있다는 점이다.

실용주의가 그것이다.

샤넬의 올 봄 시즌 컬렉션에서도 실용주의 경향이 뚜렷하게 나타난다.

이 브랜드의 올봄 테마는 미래주의(Futurism)와 스포티즘.

가장 충실하게 이 테마를 반영한 상품이 2005 핸드백이다.

둥그스름한 양감과 유선형 마름모꼴로 이뤄진 2005 핸드백 디자인은 보는
각도에 따라 의자 등받이 같기도 하고 우주선을 본뜬 것 같기도 하다.

평범한 가방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또 핸드백 형태에서 미래 도시를 연상시킬 만큼 미래지향적인 디자인이다.

2005백은 겉모양뿐 아니라 내부구조도 기존 제품과 완전 차별화된다.

우선 금속 소재로 만든 어깨끈을 붙였다 뗐다 할 수 있으며 내부에 핸드폰
과 수첩을 넣을 수 있는 공간도 마련했다.

컬렉션에서는 이 백을 베개로도 활용할 수 있음을 강조했다.

샤넬의 예언대로 정말 2005년쯤에는 베개용 가방이 보편화될지도 모를
일이다.

패션 전문가들 사이에 유틸리티 시크(Utility Chic)라고 불리는 실용주의는
샤넬뿐 아니라 브랜드의 타깃이나 컨셉에 관계없이 거의 모든 옷에 적용된다.

이탈리아 브랜드인 "돌체에 가바나"는 군복 바지에 달린 넉넉한 포켓을
상의에 달았다.

시가를 따로 보관할 수 있는 주머니를 바지에 부착시키기도 했다.

헬무트 랭에서도 이와 비슷한 "주머니 활용 패션"을 볼 수 있다.

적극적인 스포티즘의 표현으로 패션계를 놀라게 한 프라다도 실용주의를
논할때 빼놓을 수 없는 브랜드.

담배케이스만한 미니백이 달린 롱부츠와 허리에 두르는 형태의 작은 가방을
선보였다.

특히 허리에 찰 수도 있고 끈을 길게해 어깨에 엇갈려 맬 수도 있는 납작한
보디백은 올해 대히트를 예약해 놓고 있는 아이템이다.

프라다는 컬렉션에서 보디백을 종아리와 팔목에도 찰 수 있음을 보여 줬다.

이는 베개로 활용할 수 있는 샤넬의 2005 가방처럼 한가지 아이템이 동시에
여러 역할을 하는 실용적인 미래 패션을 예견한 것이다.

디자이너 뮤치아 프라다는 "미래 패션은 스커트가 가방이 되고 배낭이
점퍼로 변할 수 있는 실용적인 디자인이 중심을 이룰 것"이라고 말했다.

최근 전통속에 혁신을 활발하게 추구하고 있는 루이비통은 모노그램
베르니 라인으로 7가지 가방 모델을 선보였다.

담배나 휴대폰을 넣을만한 조그만 백과 CD플레이어와 CD를 넣을 수 있는
크기의 가방 등 역시 실용성에 초점을 맞췄다.

색상은 핑크 은회색 등 파스텔톤.

국내 브랜드도 실용적 미래주의가 디자인의 근간을 이룬다.

물론 판매를 의식, 해외 유명 디자이너 컬렉션처럼 과감한 표현은 못하지만
신소재 사용과 액세서리만큼은 "유틸리티 시크" 컨셉에 충실하다.

특히 벨트 백 또는 힙백 등 허리에 매는 식의 조그만 가방은 윈 이엔씨
모리스 커밍홈 나인식스뉴욕 등 거의 모든 여성복 브랜드에서 출시했다.

여성 영캐주얼 브랜드인 오조크는 엉덩이에 걸치는 파스텔톤 힙백을
선보였는데 먼저 나온 1차분 생산량이 매진사례를 빚었다고 한다.

패션 관계자들은 "불과 1년전만해도 전대를 연상시키는 벨트백이 이처럼
유행할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며 유틸리티 시크가 우리 소비자에게도
환영받고 있다고 전했다.

이처럼 미래주의를 표방한 패션은 기능성을 살린 하이테크 소재의 사용과
실용적인 디자인이 바탕이 된다.

기능성과 실용성이 새로운 밀레니엄 패션의 필수 요소로 등장한 셈이다.

21세기는 보기에만 좋고 편리함이 없는 옷은 더이상 패션으로 취급받지
못하는 시대인 것이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3월 26일자 ).